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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사람 Apr 02. 2020

흩어지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마도 이유가 있다면 내가 텅 비어있기 때문일꺼야.



친구관계도 급우관계도 부모님도 내 일도 나 자신의 건강문제도 스토커 문제도 연애사도 포기하는 시점엔 상대에게 말하지 않았다. 포기한다는 걸 굳이 대상에게 말해서 좋을 것이 없었고, 계기가 없다면 바뀌지 않을 생각인데 난 빌미의 여지도 안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 삶은 그랬다.

모든 문제와 사건사고에는 이유와 과정이 있었고,

삐걱거리는 관계는 잘 꿰메거나 헤어지면 끝나는 평범한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화해할 수 있는 단계도, 죽고 죽이기전에 서로를 놓아주거나 도망갈 마지막 이성도 없었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따돌림을 당했고, 스스로 이유를 모를때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편지를 쓰고 책상에 사탕을 놓아뒀었다. 정말 내가 모르는 걸 보니, 알 방법은 상대에게 듣는 것 뿐이어서 내 잘못이 있다면 알고 싶었다. 내가 고치면 되는 문제면, 아직 그럴 수 있는 단계라면 노력해보고 싶었다.


어린 나를 탐했던 자들의 의도는 몇날며칠 수년을 날 괴롭힐 뿐 알 수 없고 알고싶지도 않았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내 자신이 막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악몽에 꿈속의 나는 어렸던 나에게 '왜 도망치지 못 했어.'라며 비난했다. 그 괴물들을 막을 순 없었지만, 도망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난 나를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아프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알고 있다.

모든 관계들이 동일선상에 두고 볼 문제들이 아니고, 몇가지 문제들은 정말로 털끝만치도 내 잘못이 없었다는걸.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서 내 주변과 나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다 통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갈 능력도 없고 주제 넘은 생각이라는 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끝인데, 나는 일련의 몇가지 사건에선 깊은 무기력함을 느꼈다. '이미 어떤 가도를 향해 엎어지고 있는 건 바로세우지 못 해.'

관계에 있어서 끈질기게 노력할 수 있는 유통기한은 내가 이 관계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게 되기전까지다. 항상 곁에 있을 때 좋은 모양새 일 때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싫은 소리쯤이야 여러번 빙구웃음 지으며 들을 수 있고, 그럴싸한 말은 못 해도 필요한 때에 피신처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었다. 우는 이유가 당신때문일때조차 눈물을 삼키진 못 해도 다른 이유를 붙였다. 웃긴 사람, 응큼한 사람, 든든한 사람, 의연한 사람, 편안한 사람,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소중히 여기니까. 남들도 방법이 다를뿐 비슷할꺼라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해 보여도 전부 다 다른 객체다. 그런 객체들이기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라 여기며 지난 사건이나 대상을 탓하기보다 혼자 추스렸었다. 그런것들이 어쩌면 버릇이 된걸까. 사람을 때로 포기하는 편이 더 편안한 건.. 그런 내가 구태여 모든 걸 말하지않고 끝내 포기했을 때, 뒤늦게 붙잡아준 손에서 기적을 느꼈던 건 오직 동생뿐이었다. 여러 의미에서 내 동생이 너무 소중한데, 소중한 걸 소중하다고 반복해서 말하기는 주저된다. 같은 부모아래 닮은 힘듦과 또 다른 저만의 힘듦을 짊어진 동생, 내 위태로움을 나 다음으로 헤아리려 노력해준 그에게 내 삶의 부담까지 주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극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 나름으로 열심히 해나가고 때로 숨쉴만큼 외면하고 돌아와 자신과 주변을 챙기는 그녀에게 난 의도치않게 어느새 짐이 되어가고 있다. 유리창 너머 엄마에게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숨기고 싶은만큼 못 숨기고, 걱정시킬까봐 괜찮다고 말하는 일. 아픈 나를 걱정하는 얼굴들에 괜찮다고 말하는 일. 무한히 반복되는 그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알고있다. 날 위한 말을 골라줄 충분히 힘들지만 내 눈에 늘 어여쁜 내 동생. 힘든 일이 있을 땐 늘 어느정도 수습한 뒤에야 말하는 게 버릇이고 배려가 된 자매. 

왜 대뜸 사라지고 왜 대뜸 멀어지냐고 나를 탓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뻐끔뻐끔 금붕어가 되었다. '나는 그런 때에도 참았고 힘들었지만 좋아하니까 사람이니까 다르니까 내게 그럴 수 있다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 그만할래.'라는 말 뒤늦게 해봐야 지난 함께한 시간을 전부 거짓으로 만들 것 같았다.

대상에게 말없이 혼자 그럴듯한 견고한 이유를 포장해왔지만, 어쩌면 난 양방향 관계에 재주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흘린 애정도, 상대방의 애정도 짝사랑으로 만드는 이기적인 겁쟁이랄까. 깊은 관계는 연인이 아니더라도 어렵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버겁다.


관계가 깊을수록 무너질 때 더 요란하고 끔찍하단 걸 너무 선명하게 매일 되새김질하고 있다.


내 나름의 경험과 이유와 트라우마들로 이루어진 내 모양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나를 배려하기 위해 애쓰도록 만들고 싶진 않다. 그런건 애정을 인질삼은 폭력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예전에 그렇게 느꼈으니까. 모순되게도 한계까지 다다르면 끝끝내 이 사람은 내 웃는 얼굴 뒤는 관심이 없구나-라고 체념하니까, 내가 어쩌고 싶은지 모르겠다. 사실은 자연재해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내 존재를 가장 먼저 세상에서 지우고 싶어진지 오래니까, 지쳤으니까. 그럼에도 변덕스럽게 이기적이게 사람과 닿아있고 싶어하고 쉽게 또 좋아하고. 단절되고 싶은거면 나 자신을 격리시키고 싶은것이라면 좀 더 완벽하게 해야하는데 이기적이게 가끔씩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람이 들어간다. 그리고 의도치않게 벌어지는 나쁜 일들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거나 놀라서 다시 꾸물꾸물 내가 지어둔 동굴속으로 쏙 숨어버린다.


잘못했어-라는 말로 '으이구-'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상황이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목구멍 깊은 곳에서 먹먹함을 느끼며 주고받은 애정을 인질로 무언가 폭언이 될만한 말이 하고싶어지고 그걸 절대 밖으로 꺼내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면 벙어리가 된다. '네 탓도 있었어. 너도 그랬어. 그거 아니야.'라는 말을 할 바에야 내가 나쁜 걸로 하고 숨는게 더 맞다고 그렇게 치부하고 정리한다.

'고마웠어. 미안해. 내가 여기까지인거야. 소중한 인연의 에너지를 낭비시키게 해서 미안해.' 

그냥 타인도 관계도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내 깜냥을 깨닫고나니, 더더욱 사람과 가까이하기가 두려웠다. 사람은 늘 그랬다. 어느틈엔가 가까워지고 소중해지고 기적같아지고 또 부서지고. 경도따위 없는 유리같고, 손틈새로 흩어지는 모래알같다. 


그런 연약한 유리, 그런 옅은 모래 주제에 한 여름밤의 바다처럼

여느 보석보다 반짝이는 값어치가 나갈 것처럼 찬란하게 예쁘다.

매번 바보같이 학습도 못 하는지 눈이 멀어버린다.

친구라고 불러줘서, 좋아한다고 말해줘서, 필요하다고 말해줘서 주변을 헤맨다.


그 파편은 마음쯤은 쉽게 죽일 수 있는 칼날이 되기도 하고, 때로 자라서 형태를 가진 살인무기가 되기도 한다. 분명 한때는 활짝 피어 흔들리는 꽃이며 상대를 위한 방패가 되기도 했을텐데. 그런걸 보고나면 이성적으로는 모든 관계가 다 그런게 아니란 것 쯤이야 분명히 알아도, 겁이 난다. 매번 좋은 날만 있을리 없는 것이 관계라는 것도 알지만, 나는 그 흐린 날 중의 최악의 날이 무서워. 내 두려움이 만든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나에게 그건 상상도 영화도 소설도 아닌 현실이었는걸. 나는 아직 그 길에 여전히 놓여있어.


이렇게 위태로운 사랑밖에 못 주는 나는 아마 누구와도 교감하긴 어렵겠지.

미안해.


그러니까 계절이 바뀌어감에

바뀌는 것 하나 없으면서 괜스레 바람이 불어

어딘가를 누군가를 쫓아 변덕부리지 않게 노력할께.


잔잔하게 고여있는 물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찾아와 돌멩이를 던져도

조금 일렁이다 이내 잠잠해지는 태연한 물.


의도치 않았다고 해서 모든 결과와 죄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나는 사실 내게 저지른 그들이 벌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니까.

내 힘으로 그들을 처벌할 수 없음을 사는동안 매일 나는 되새길테니까.

벌하고 싶지 않은 가해자는 또 사회가 벌하고 있으니까.

피해자엔 아빠와 유가족만 있는게 아닌데,

가해자의 자녀가 아니라 피해자의 자녀이기도 한데.

정말 중요한 때엔 지켜주고 막아주지 못 하더니,

기대어 쉴 단 하나의 작은 나무조차 뺏어간 사회가 당연한 것이니까.

그 것을 너무 잘 이해하니까.

이해하는만큼 숨막히는 세상이다.


어느 때엔 한치앞도 안 보이는 밤의 산을 따라 빙빙 둘러진 도로같아 발 앞에 놓인 헤드라이트에 의지하기 바빠 많은 것을 놓쳐버리고, 또 어느 때엔 모든 것들이 반겨주는 것처럼 반짝이는 도시의 조명과 간판 아래 '어서오세요'라며 웃는 사람들같다.


하지만 알고있지.

사실 조금 더 노력하면 더 많은 걸 알아챌수도 있고,

그 조명과 간판들이 꺼지면 반겨주던 사람들도 고단한 웃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걸.

도시는 모든 걸 반겨주는 것처럼 반짝이고 시끌벅적하지만,

눈엣가시같아 경적을 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사람없는 아지트를 저마다 소유하고 싶어해.





Photo by Todd Diem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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