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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사람 May 03. 2020

꾀병 어른, 섬유근통증후군

꿈과 희망이 없는 미래는 무의미하다고 배웠는데, 괜찮은걸까.



선천적인 체질에 어려서 당했던 가정폭력의 후유증과 소녀가장 신분에 여의치않아서 돌볼 수 없었던 시간까지- 복합적인 이유로 신경질환계의 전신에 통증을 앓는 지병이 있다. Fibromyalgia Syndrome, *섬유근통증후군이다.

확실히 내 병명을 알기 전까진 디스크 중 일부가 터지고 탈출중이었고,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어려서부터 빈혈에 가위도 자주 눌렸으니까 그런 복합적이지만 흔한 이유로 몸에 병이 있다고 생각했다. 통증과 일상생활의 불편함이 생긴 것은 고등학교때부터였고, 회사를 다니게 된 후에도 왜 근태를 똑바로 못 해내는지에 추궁을 받아야 했고, 스스로도 마음의 꾀병이 아닐까 의심을 하고 원망할 정도로 내 자신이 못 미덥고 혐오스러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폭력의 후유증으로 척추가 휘고 돌아갔기 때문인줄 알았다.

분명 전신에 다양한 통증이 수시로 발생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거나, 의자나 변기에서조차 못 일어나고, 샤워하다 구역질과 함께 쓰러지고, 전혀 춥지않은 날씨에도 손에 염증이 생기고 시려웠으니, 내일의 일상에 또 당연시 있을 아침기상의 통증릴레이가 두려워 불면에 시달린다. 이제 막 생활비를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닐때에도 통증이 밀려오면 허겁지겁 군것질을 하거나, 화장실에 달려가서 신음하고 울다 오거나, 그도 안 될땐 통증에 덜덜 떨어가며 일을 했었다. 



*섬유근통증후군 http://jkna.org/upload/pdf/201301001.pdf
증상과 원인, 치료, 학계 내용이 담긴 자료. 이유없는 전신 통증으로 힘드시다면 확인해 보세요. 근막통증후군과 다릅니다. 또 일반 작은 병원들에서는 진단하지 못 하거나, 아직도 그런 병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의료진도 있습니다. 가장 쉬운 진단법으로 전신 통압점을 촬영하는 체열검사가 있습니다. 아무 외상이나 내상이 없음에도 전신에 걸쳐 통증이 촬영되는 방법입니다.





건강상태에 대해 알려야할 의무가 있는 관계여서 그냥 건강이 좀 안 좋다-라고 간단히 말하고나면 다음부턴 좋은 의도로 "요즘은 좀 어때요?"라고 물어온다. 또 내 안색이나 상태를 보고 걱정을 담아 물어오기도 한다. 호의, 걱정, 인사치레. 뭐가 됐든 나쁜 것은 아닌데 수백번 넘게 만나는 사람마다 어색한 얼굴로 "오늘은 괜찮아요", "...", "똑같죠 뭐- 하하"중에 거짓말을 하거나 웃어가며 애써 말하는건 늘 내 자신을 울적하고 외롭게 만든다.


항상 매일 눈뜨고 감을때마다 식사, 화장실 등 통증에 대해서 계속 자각하고 다음 일상의 통증도 짐작하며 사는데, 지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마음은 힘들긴하다. 우울한 과거나 심정에 대해 글을 쓰곤 있지만, 다사다난 박복했던 과거때문에 사소한 행복으로도 기분이 들뜨기도 한다. 다만, 금새 이 통증과 불편함은 타인은 모르게 내게 찬물을 계속 끼얹는다. "넌 아파, 불편해, 불행해, 못할꺼야, 약속하지마, 기대하지마, 꿈꾸지마."라고.


종종 이렇게 구차한 나를 헤아려주는 이가 있는 것이 눈물나게 고맙고 뭉클하면서도 그런 고마움과 별개로 변함없이 아프고 불편한 나는 "괜찮아요."라는 거짓말쟁이가 되기 일쑤였다. 힘이 나서 걱정끼치기 싫어서 괜찮다고 웃어놓고 머지않아 "오늘 아파서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팠어요, 죄송해요."라는 말 역시 수업이 많이 했다. 병가를 내고 쉰다고 해서 다음날의 컨디션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지병이란 그런거였다. 아프다고 쉬었으니, 걱정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자 회사의 선배 동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밤을 새거나 주말에도 일을 하거나 어차피 불편하니 화장실도 하루에 한번 갈 정도로 참아가며 무리했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후에 일하면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또 아프잖아-라고 꾸짖던 분도 있었다. 쉬엄쉬엄 일하거나, 남들과 비슷한 리듬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다 쉰만큼 회복되는 게 없지, 월급을 어떻게든 꾸준히 받아서 고모부에게 드리고 우리 남매 생활비에 보태야한다는 압박에, 회사에서 이런 리스크가 많은 햇병아리를 내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불안했던 나로썬 무리에 무리를 더하고 늘 눈치보고 죄송해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몇번인가 직장상사나 주변인으로부터 이런 대화를 했던 적이 있다. '진짜로' 평범한 근태나 일상을 내내 지키는게 불가능한 정도로 아픈거냐, 통증을 제어하거나 인내하면 안되겠냐, 운동하거나 수술하면 안 되냐-라고 꼬치꼬치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물어왔는데 곤혹스러웠다. 이만큼 아프고, 이만큼 해결책이 없고, 보여줄순 없지만 수술에 대해 알아봐왔고, 재활에 대해 최대한 저렴한 방법으로 혼자 시도해왔다말하곤 못 참고 울어버렸다.

섬유근통증후군을 대부분이 복합적 합병을 갖고 있고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전되게 하려면 환자의 상태와 체질에 따라 다방면의 치료를 병행해야한다. 심리 치료 및 항우울 약물치료, 바닥난 체력과 통증에 부담되지않을 전문가의 1:1 재활치료, 긴 시간을 투자해서 차근차근 환자마다 맞는 치료법과 약물을 실험해야 한다. 내 경우엔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는 체형과 통증 치료에만 월 최소 50~100만원 이상 들어갔다. 무엇보다 일시적인 치료였으니까, 꾸준히 가야만 하루이틀 덜 아팠고, 병원을 다녀오는 일과와 재활과정에서온 피로로 근로가 우선이었던 나는 점심시간을 내어주고 그 시간에 치료를 받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정폭력덕에 척추가 돌아간 문제도 있어 마침 소화가 잘 안 되었으니 식사도 거르게 되었다. 당연히 몸무게는 쭉쭉 빠져나가서 살을 찌워야된다는 말 역시 의사선생님에게 들었다.


이후에 조금 급여가 안정적이게 되었을 때 희망에 차서 제일 크고 유명한 병원들에 가고 원장 특진을 예약받아 당장 수술비와 입원비, 회복 기간에 대한 여유는 없지만 알아보았었다. 월 최소 150만원 정도를 투자해 예후와 경과를 봐야하니 내게 맞는 치료법을 함께 찾아가보자고 했다. 섬유근통증후군을 낫게 하기 위한 것중에 하나로 돌아가고 휜 척추뼈를 못들로 꼿꼿하게 교정하는 큰수술을 해야한다고 말하면서도, 수술비는 수천만원에 회복기간만 최소 반년, 후유증으로 목이나 골반뼈가 돌아갈 것이고 허리를 쓰기 힘들 것이라 했다. 난 여전히 소녀가장에서 나이 4살 더 먹고 저축할 겨를 없이 빠듯하게 살아온 상태였다. 급여가 150여만원에서 좀 올랐다고 신나서 찾아가봐야 절망할 뿐이었다.


고모부가 죽은 아버지의 연금과 조카들을 향한 후원비, 조카들의 급여를 횡령했던 사실을 몰랐던 스무살 때. 고모부에게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고 동생들과 언젠가 경제적 자립을 하고 싶어서 고모부의 소개로 척추신경계에 약물을 주입해 통증을 마비시키는 주사치료도 받았었다. 근본적으로 고칠 순 없어도 통증이라도 못 느끼게 주기적으로 이 주사들을 맞으면 일은 가능해서 돈을 벌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당시 내 정확한 병명을 모르고 막연히 디스크때문에 온 통증으로만 보고 그런 시술을 받았으니 당연히 극심한 몸살에 몸져 누웠고, 회사에서 해고통보를 받았다. 당연한 처사였다. 회사는 자원봉사단체도 아니니까. 하물며 자원봉사단체도 세상에 차고 넘치는 다양하게 아프고 복잡한 사연들을 수용하긴 불가능하다. 




예전엔 내가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덜 아픈동안 할 수 있지 않을까- 돈 벌어둬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덥석덥석 일을 쫓았고, 무리해나갔다. 하지만 나아지기는 커녕 악화되고 내 마음을 차근차근 잘근잘근 갉아먹는 지병앞에 별 수 없이 받아들이며 생각한다. 내 몸은 절대 죽지 않지만 죽음을 희망할만큼 살아있는동안 내 발목을 잡을테고, 내 마음을 끝없이 갉아먹을 것이다. 이것은 기적처럼 나아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고, 또한 내 병든 몸과 마음의 탁함이 내 주변인에게조차 짐이고 우울이 될 것이다. 내가 불가능한 것들과, 내가 미끄러져서 실패한 후에 겪을 좌절에 대해. 그리고 최대한 좌절하지 않고 나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하지 말아야하는 것들에 대해 거듭 배워간다. 무리한 일정이나 약속 잡지 않기. 감정적으로 스스로를 혐오하도록 지치게 하는 사람들과 무리해서 유대를 이어가지 않기. 욕심나는 인연이나 여행, 야외 행동, 문화생활, 운동을 동경하는 것에 못 그치고 비교하지 않기.


일을 새롭게 시작하거나 사람을 만나기로 마음먹었을 땐 처음부터 말하고, 그 뒤론 최대한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변호하기 위해 필사적이지않기. 낯부끄럽도록 필사적일 때의 자신을 싫어하지않기. 다른 이나 상황, 사회의 이해를 한조각이라도 꿈꾸고 지레 감사함에 부풀어 오르지 않기. 터져버릴땐 언제나 그만큼 밑으로 떨어져버리고 내일과 같은 조우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니까.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 되는게 하나 없는 삶이어도,

차선의 차선의 차선, 확신에 찰만큼 별로인 선택밖에 답이 없을 때도

일단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이면 비관하지 말기.

어떻게든 스스로의 생계와 병든 미래 만큼은 최선을 다해 책임지기.


꿈과 희망이 없는 미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포장된 모든 동화와 자기개발지침, 연설들에 휘둘리지 않기. 꿈과 희망이 없어도 살아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끝도없이 어두운 현실에 포기하고 싶어질때엔 아무것도 하지 말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거나 혐오하지 않기. 그냥 뻔뻔하게 계속해서 살기. 


그냥 어떻게든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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