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학부 또는 대학원 석사까지 마친 다음에 미국에 유학을 나온 이들에게 미국식 디스커션 수업은 어렵다. 정말 어렵다!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 대학원을 진학한 유학생들이 마치 스스로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사회과학 분야 유학생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은 경우가 바로 이 디스커션 때문이다.
디스커션이 어려운 대표적인 이유는 언어장벽과 문화장벽 때문이다. 영어가 모국어처럼 편하지 않다면 당연히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이해와 표현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요샌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곤 하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문화차는 존재한다. 내 의견을 쉽게 잘 내비치거나 개진하지 않는 한국의 문화적 규범에 익숙하다면,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미국 디스커션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내 경우는 둘 다 해당됐는데, 거기에 나의 내향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초짜 유학생이던 나에게 디스커션 수업은 내게 올려다볼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하필 내가 있던 전공의 박사과정에서는 거의 모든 수업에서 디스커션이 수업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터널을 파든 둘러가든 어찌하든 간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아래의 5가지 방법은 다른 어떤 것도 참고하지 않고 그냥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는 여행을 제외하곤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하거나 지내본 적이 없으며, 대학원 석사까지를 한국에서 마치고, 영어에 그다지 실력도 자신감도 없고, 사회과학/교육 분야의 박사생이었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고민이 있는 분이라면 조금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아래 내용은 '이렇게 하면 디스커션 수업에서 성공합니다!'라고 하는 성공비법 같은 게 전혀 아니다.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거나 교내 스피킹센터 서비스를 받는 등 체계적인 학습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디스커션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말 그대로 살아남으려고 뭐라도 해 보려던 아둔한 어느 박사 유학생의 회한이 담긴 것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최악은 면해보자'는 내용에 가깝다. 지금 다시 박사과정 첫 학기를 시작한다면 (물론 그럴 마음은 없음) 아래 내용을 바탕으로 디스커션을 아주 조금은 더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느낌으로 써본 글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디스커션에 성공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많은 수업에서 그 준비란 해당 수업에서 그 주에 미리 할당된 논문을 읽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냥 내용만 '읽어가는' 걸로는 사실 충분하지 않다. 읽은 내용은 반드시 3-5가지의 키포인트 위주로 요약해 보면 도움이 된다. 포인트가 5개를 넘어가면 (사실 내 기준으로는 3개만 넘어가도 그렇다) 사실상 핵심 내용의 요약이 아니라 전체 논문을 정리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질문을 제기해 보는 일이다. 나 역시 논문을 인쇄해서 읽을 때나 랩탑으로 읽을 때나 언제나 나름 나 스스로 조금 '이거 좀 예리한 질문 아닌가!' 싶은 부분들을 메모해 뒀었다. 대부분은 뭐 딱히 그렇게 예리한 질문은 아닌 걸로 밝혀지지만.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다른 연구들까지 준비하면 더 좋겠지만, 질문을 생각해 가는 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논문 1편 당 논문의 핵심 내용 (방법론, 주요 결과, 함의점 등) 3가지 정도와 질문 2-3가지를 준비하려고 했다.
갑작스레 디스커션의 숲에 떨어져 길을 헤매며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는 분들에게 본론으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얘기다. 선빵 필승이라 했던가. 디스커션 준비를 해 왔다면, 토론의 첫 발화자가 되는 것이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디스커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이유인즉슨, 디스커션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 중 하나는 '대체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나'이기 때문이다. 상황은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다른 학생들의 디스커션과 교수님의 코멘트를 겨우 이해하고 나면 머릿속에 내 생각이란게 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생각이 영어로 변환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아, 드디어, 뭔가 이렇게 말하면 되겠다, 라고 마음을 먹는 순간, 주제는 이미 다음 걸로 넘어가 있다. 그러면 다시 온 정신을 집중해서 동료 및 교수님의 말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정립하고.. 이제 뭔가 말할 준비가 좀 된 것 같은데,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의 반복.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가장 먼저 말하기다. 이미 주제도 알고 있고 준비도 해온 상황이라면 내용은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교수님 또는 디스커션 진행자가 화두를 던지는 즉시 바로 준비한 내용을 말하면 된다. 이 방법의 가장 좋은 점은, 어떻게 보면 내가 해당 주제에 대해 먼저 화두를 던지는 셈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얘기가 맥락에 맞는 얘기인지에 대한 고민은 덜 수 있다는 점이다.
꼭 내 '의견'을 장황하고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야만 디스커션에 성공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을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참여방법이다. 질문을 통해 상대의 의견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관심을 표현할 수도 있고, 상대의 의견에 대해 추가적인 내용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정상적인 박사과정 프로그램의 정상적인 수업이라면 결코 질문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는다. 박사과정을 요약하자면, 지식의 탑을 팔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파보고, 아직 답해지지 않은 좋은 질문을 발굴해서, 내가 한 번 답해보는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해 온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같은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개진해 나가는 걸 듣다 보면 이런저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동료가 말하는 내용이 내 생각과 다를 때는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런 접근에 대한 네 생각은 어때?"라고 질문할 수 있다. 실천 (practice) 이 중요한 우리 분야에서는 어떤 주제가 나오면 "그 개념을 적용한 사례나 직접 실천해본 경험이 있는지" 묻는 것도 좋은 질문이다. 때로는 분명 논문 리딩을 해 갔는데도 처음 듣는 개념이 나오면 "그 개념은 내가 익숙하지 않은데 어떤 개념인지 설명 좀 해 줄래?"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이건 상당히 단순한 형태의 질문이지만, 의외로 내가 모를 때는 다른 참여자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 제쳐두고, 내가 정말 그 개념이 뭔지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면 된다! 그래도 괜찮다.
넓은 학문의 세상에 나와 멋지게 내 의견을 또박또박 말한다. 교수님은 날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동료들은 감탄하며 박수를 친다. (...) 모두가 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일 테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내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좋지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다면 깨작깨작 뭘 해 봤자 될성부르지가 않다는 느낌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기 힘들다. 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야 할 이유다.
내 경우 첫 학기에는 2-3시간 동안 이어지는 디스커션 수업에서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단 한마디도! 나의 박사과정에는 육아라는 넘어야 할 큰 산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가 밤새 잠을 수 번씩 깨서 울어대는 날이면 나도 잠을 설쳐서 아침에 비몽사몽 수업에 들어간 적도 많았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도 나에겐 디스커션 참여가 쉽지 않은데, 수면부족의 머리 상태로는 영어로 문장도 잘 만들 수 없었고 입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단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자괴감이란.
그래서 정말 수준 낮은 목표를 세웠다. 그건 바로 '단 한마디만 하자'였다. 단 한마디도 못한 날도 더러 있었으니, 단 한 마디만 하는 걸 목표로 세운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가장 먼저 말하기'나 '질문하기' 중 하나만 해도 그날의 목표는 달성이었다. 할만했다. 정말 수준 낮은 목표지만 달성 가능한 현실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목표를 달성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안하니 이후의 디스커션에서도 말 몇 마디를 계속 더 하게 되었고,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날들을 늘려갈 수 있었다.
첫번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너무 뻔한 얘기지만 적지 않을 수는 없었다. 유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주하게 된다. 나랑 영어실력은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니 솔직히 나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한데, 더듬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인터내셔널 학생들을 말이다. 결국 자신감이 중요한 것이다. 나의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진 게 느껴진다면,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한다. 오글거리더라도 거울을 보고 뺨을 촵촵 때리며 할 수 있다! 외쳐보든지, 어쨌든 외국어인데 지금 하는 이 정도도 대단하다고 스스로에게 격려도 해 주든지.
수업을 마치고 낙담해 있던 내게 실제로 미국인 코호트 친구 한 명이 "너는 모국어도 아닌 세컨 랭귀지로 하는 건데 그거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나는 내가 다른 나라에 가서 다른 언어로 수업 듣고 얘기하는 게 상상조차 안돼!"라고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냥 하는 말이었는진 모르지만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위로가 많이 됐다. 그리고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감에 대한 얘기는 당연하고, 추상적이고, 또 조금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내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스푼의 패기와 또 한 스푼의 뻔뻔함을 장착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