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쉽지 않다. 깊은 관계일수록 오히려 더 그렇다.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알 것만 같은 오랜 친구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형제자매에게, 그리고 배우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뭐가 어려운 걸까.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사과는 진정성을 동반해야 한다. 그런데 진심을 표현하는 것부터가 많은 사람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오래되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진심은 그냥 넣어두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 외에도,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아야 하고, 미안한 마음을 언어로 표현도 해야 한다. 마음에만 머무르면 마음일 뿐 사과가 아니니까. 말이든 글이든 언어화되어 뱉어져야 하고, 뱉어진 건 상대에게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인 또는 연예인 등이 사과문을 내놓는 경우를 보면 동네 북처럼 늘상 두들겨 맞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를 보면 사과에는 적당한 타이밍과 표현방식도 중요한 게 틀림없다. 그래서 사과란 아주 여러 가지 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일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능력과 기술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 사과를 할 수 있다는 건 자기반성 (self-reflection) 을 통한 자기객관화가 됨을 뜻한다. 자기객관화란, 말 그대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함을 뜻한다. 자기객관화의 가장 큰 장점은 스스로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다.
'조해리의 창'이라는 도구가 있다. 나와 타인의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인데 이 도구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유형화하면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나',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르는 나', '나는 모르는데 너는 알고 있는 나', '나도 너도 모르는 나'의 4가지 '나'를 도출할 수 있다.
자기객관화란 이렇게 여러 각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은 내로남불을 시전하지도 않고, '난 옳고 넌 틀렸다'는 식의 지나친 자기확신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자기객관화는 메타인지를 필요로 한다. 메타인지란, 초인지, 즉 나의 생각에 대한 생각이다. 즉 나의 인지에 대한 인식을 함을 뜻한다. 예를 들자면 드라마에서 우영우를 보며 자폐스펙트럼장애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발견해내고, 내가 그런 편견이 있었음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또는 내가 강하게 믿고 있는 생각이 있더라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식하는 능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메타인지를 통한 자기객관화는 결국 공감의 출발이 된다. 공감의 큰 요소 중 하나는 관점 채택 (perspective taking)인데, 즉 주어진 상황을 나의 시야가 아닌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상황을 상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러한 공감적인 시선이 없다면 진심 어린, 그리고 스스로의 잘못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동반되는 사과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사과를 하는 사람은 용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자신의 잘못과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어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사과까지 이어질 수 없다. 이 용기란 바로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 즉 버너러빌리티 (vulnerability)다.
흠 또는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흠이 있지만 자신의 흠과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유능함과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며, 부족한 부분은 축소하거나 감추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사과까지 건넬 수 있다는 건 스스로의 약함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강인한 사람들이다. 나의 약함을 드러낼 때 실은 강인함을 드러내게 된다니, 역설적이고 흥미롭다.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사람에겐 열등감이 없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의 경우 심한 자기비난에 빠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오히려 겉으로는 열등감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신을 과시하거나, 상대방을 지적하거나 깔아내림으로서 우위를 점하거나 하는 방식이다.
이는 감당할 수 없는, 또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열등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다. 정확히는 방어기제 중에서도 '반동 형성 (reaction formation)'이다. 즉, 받아들일 수 없는 억압된 무의식적인 감정을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려 표현할 때에 정 반대되는 표현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의외로 순순히, 정상적인 사과를 하기 어렵다. "난 쓰레기야"라는 식의 과도한 자기비난을 한다면 그 초점이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있기에 진정한 사과라 보기 어렵다. "다 내 잘못인데, 내가 죽어야지"라는 식의 반응이라면 전형적인 수동공격성 (passive-aggresve) 반응이다. 그래서인지 열등감을 가진 많은 이들은 잘못을 해놓고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과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다. 자기반성과 자기객관화, 스스로의 부족함을 들여다보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열등감이나 자존심이 아닌 건강한 자존감이 마음에 담긴 사람. 이들은 스스로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쳐 나간다.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과가 남용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아낄 필요도 없다. 나와 상대와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면, 그냥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면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상대방이 나의 사과에 실린 진심과 무게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나은 스스로, 그리고 일보 전진된 관계를 위하여 용기를 내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