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메이커(Rainmaker)가 된 기억

디지털시대의 기우 (杞憂)

by 피터팬신드롬

전국 로드맵을 짜고 출장 중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전날, 지역 거래처와 거나한 술자리를 가졌었고, 다음 날 새벽부터 그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참 깊은 내면과 조우하며 정화(?)의 시간을 갖고 있는 나에게 고객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고객은 얼마 전 내가 제안한 서비스에 대해 예산을 잡기 위해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며, 그 보고가 2 시간 있다가 있을 예정이란다.


‘어쩌라고?’


보고서를 대신 써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제안 당시 촘촘한 문서를 제공하지 못한 탓이다.

AS-IS, TO-BE 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한 장 짜리 보고서가 필요했다. 공공기관 특성상 예산절감이라는 소구점을 강조해야 하는 자료다. 까다롭다. 얼마나 절감이 되느냐는 수치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고객의 급한 요청은 당혹스럽긴 했지만, 매출 확정이 코앞이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 바닥에 단비가 흩뿌려지는 드라마틱한 상황이니 사실은 눈물 나게 고마운 상황인 거다.


그런데 나는 현재 변기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라니…. 영업지원을 하는 Admin 이 없는 회사이니, 내가 작성을 해서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데, 영 몸 상태가 머리를 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대강 참으면 되는 정도의 두통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두통약을 먹어서 해결될 지끈 거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노트북을 열고, 화면 분할로 오른쪽에는 한글프로그램을 열고, 왼쪽에는 참고할 제안서를 띄워 부진한 나의 매출실적에 촉진책이 되어줄 한 장 짜리 보고자료를 만들었겠지.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 가르마 결대로 머리가 두 동강이 날 것 같은 두통과 속에서는 부글부글 메스꺼움으로 거의 울고 있었다.


‘아 어쩐다?’


망연자실 퉁퉁 부은 눈으로 애꿎은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데….

모텔 영화채널에서 신하균, 이광수 배우가 주연한 ‘나의 특별한 형제’라는 영화가 한참 나오고 있었고, 극 중 지체장애자인 신하균이 휠체어에서 넘어져서 애타게 ‘시리’를 찾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그 이름.


‘생성형 AI!!!’


결론만 말하자면 생성형 AI로, 그것도 모바일에서, 30분도 채 안 걸려서 한 장 짜리 자료를 공문서의 톤 앤 메너(Tone & Manner)까지 맞춰 작성하여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분기, 나는 메마른 땅에 단비를 불러온 레인메이커 ( rainmaker )가 될 수 있었다.




이 시대 생성형 AI 서비스가 준 편리함은 가히 파괴적이다. 그러나 이 편리함은 발전의 표상인지 퇴보의 징조일지는 잘 모르겠다. 양날의 검을 당장 쓰는 것에 급급하게 되면 순기능과 함께 역기능도 작용할 터. 특히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단비를 부르는 기우술사가 될 수 있게 한 이 기회를 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생성형 AI에 뺏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편리함 뒤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 그 풍요로움 속에 도사리고 있는 독(毒)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진 않을까?


CD를 거쳐 Mp3 플레이어로 넘어오다 이제는 LP판 수집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음악이 주는 즐거움은 그 결이 달라졌다. 이제는 전 세계 음악 콘텐츠를 접할 수 있으니 귀는 호강이지만 오히려 나는 피로해졌다. 오매불망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다음 음반을 기다리는 마음과, 그 앨범 한 장에 수록된 한 곡 한 곡에 내 마음을 싣고, LP 판을 고운 융으로 닦아내며 턴테이블에 올려 끄집어내던 그 마음이, 이제는 아련해져 버렸다.


스포티파이 랜덤 플레이를 틀었다. 아침에 들리는 렌덤플레이는 일종의 타로 같다. 그날 기분에 맞으면 좋고 틀리면 짜증 난다.


우리가 맞이하는 이 시대의 감성이 메마르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 기원, 이 노래에 담아본다.


Creed-Rain.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