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보내고 두 달이 지나서야
얼마 전 할머니가 죽었다. 우리 할머니 나이는 89살. 목욕탕에서 얻은 중이염이 계기가 돼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 몇 달을 앓던 할머니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자리를 잡았다. 생과 사를 오가는 와중에도 서울과 미국에 있는 손자를 차례로 보고 세상을 떴다.
지난 6개월간 하루 네댓 건의 변사 소식을 접했다. 내가 담당하는 구역은 몇 개 동이 전부였는데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갔다. 개중에는 노환으로 인한 사망이 가장 많았다. 고독사와 자살도 흔했다.
죽음이 뉴스가 되려면 ‘얘기’가 되어야 한다. 죽은 이의 나이가 젊거나, 사연이 있거나, 유명인이어야 ‘얘기’의 범주에 속할 수 있었다. 햇반을 켜켜이 쌓아두고 시반을 남긴 채 3일 후 발견된 고시원의 아저씨나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수술을 받게 돼 허리 높이의 안전바에 목을 맨 중년의 자살은 얘기가 되지 못했다.
우리 할머니의 죽음은 얘기가 안된다.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 숨을 거뒀다. 사건과 사고를 다루는 기자의 시각에서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할머니의 역사나, 염을 하던 장의사를 둘러싸고 엉엉 울던 가족의 슬픔 같은 건 모두 휘발되어 버린다. 시의성, 근접성처럼 대학시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뉴스가치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폭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응급실에 누운 할머니를 보며 스스로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내가 성의 없이 흘려보낸 수십 명의 마지막 모습도 이러했을까. 머리가 다 빠진 할머니는 가래 끓는 소리를 반복하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오른팔은 주삿바늘을 꽂다 생긴 멍으로 시꺼메져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할머니, 혁수 왔어”라는 소리를 하면 감았던 눈을 3초 정도 떴다. 다른 신호는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떴다. 재로 바뀐 할머니는 바다로 갔다. 난 가족들과 함께 할머니를 흩뿌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은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사건과 사고에 다시 익숙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죽었다. 나는 그 죽음을 일상처럼 챙겨야 했다. 할머니를 보내고서도, 타인의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는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남의 죽음을 일상처럼 흘리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진짜 슬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