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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Mar 01. 2022

베를린, 2014-2017

누구에게나 ‘나'의 원류(源流)로 기억되는 장소가 하나쯤 있다. 거기 머물렀던 물리적 시간의 길이와는 무관하게, 짧은 스침만으로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 장소. 마치 만화 <드래곤 볼> 속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혹은 소설 <마의 산> 속 베르그호프 요양원처럼, 바깥으로 나와보니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어 있는 그런 연금술적 변화를 경험한 곳 말이다. 


2014년의 봄부터 16년 가을까지, 2년 반 정도 베를린에 머물렀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충동적인 감정이라기보단 마음 깊숙한 곳 조용한 불처럼 수년여에 걸친 마음의 변화로 당시 난 ‘고독'이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내 안에 빠져 있는 무언갈 완성시켜 줄 퍼즐 조각처럼 느껴졌던 스물몇 살의 나.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자 무한한 가능성의 문 앞에 서 있는 듯했던 그때의 흥분을 기억한다. 그런데 왜 수많은 도시 중 하필 베를린이었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베를린이 전 세계 모든 힙함을 끌어모은 것 같은 도시였기 때문에, 혹은 유럽에서 스타트업 커리어를 시작하기 유리해서? 모두 약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이유지만 그건 개인적인 이야기를 터놓기엔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내가 종종 사용하는 핑계일 뿐, 사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이가 없을 만큼 무모했지만 그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베를린에 있었다는 게 그 이유다. 좋아했으나 사실상 모르는 사람과 같았기 때문에 무모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스친 건 그때로부터 1년 전이었고, 당시 나눈 10분 남짓의 대화, 그게 내가 붙들고 있던 전부였다. 그 대화에서 내가 느낀 무언가가 1년 후 바다를 건너 거처까지 옮길 근거가 되었다. 당시 어떤 경로로도 연결이 되어있지 않아 심지어 그 얼굴마저 가물가물한 사람이었는데. 


베를린은 내겐 모든 게 낯선 도시였지만 나는 미션을 받은 군인처럼 그 땅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전략적이면서도 무식한 방식으로 미션을 충실히 수행했다. 오랜 구애 끝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만남이 있었고,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이별에 꽤 오랫동안 아팠다. 아아, 그 지지고 볶은 억겁의 시간이 이렇게 건조한 한 문장으로 정리되다니. 


그런데 내가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베를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전엔 스스로 부여한 미션이 베를린 자체였기 때문에 눈이 있어도 나를 둘러싼 도시를, 내 생활을 가만히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다. 지난했던 사랑타령의 늪에서 탈영하고 나니 베를린의 넓은 거리가 눈에 띄었다. 면적으론 서울보다 1.5배 정도 크면서 인구는 3분의 1밖에 안 되는 이 도시는 어딜 가도 붐비는 법이 없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엘 가도 인도가 널찍하게 설계되어 있으니 공간감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이때 난 물리적 공간의 여유가 정신의 공간을 열어준다는 걸 처음 깨달았고 <명랑한 은둔자>를 쓴 캐롤라인 냅처럼 말하자면 처음으로 ‘고립’이 아닌 자발적 ‘고독’을 배웠다. 나는 지금 베를린에 와있다. 이 도시에 내가 존재한다… 그렇게 3인칭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낀 시간이었다.


당시 일기를 보면 다니던 회사가 내부 분열로 인해 공중분해되고, 고기 사 먹을 돈이 없어 감자만 넣은 카레로 일주일을 연명하면서도 그때 난 꽤나 즐거웠던 것 같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공간을 발견한 나에게 고독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았고, 풍파로부터 나를 지키는 실제적인 방패가 됐다.


그래서 내게 베를린이란 도시는 하나의 메타포다. 이 도시를 힙(hip)의 상징으로 만드는 모든 요소들 -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 된 도시의 역사, 빛바랜 색감의 건물들, 잿빛 날씨, 널찍한 공간에서 오는 마음의 여유까지 - 이 모든 게 무심한 듯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 누구의 설계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실 우린 계획하지 않았던 것들의 일관성 없는 축적이다. 예를 들면 무모한 열정에서 시작해 긴 아픔을 남긴 사랑, 그로부터 얻게 된 소중한 내면의 공간, 감자밖에 없는 카레를 꾹꾹 씹어 넘기며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 안도했던 시간, 이 모든 시간을 함께 걸어준 좋은 친구 같은 것들의 축적.


그 결과물인 지금의 내가 난 썩 맘에 든다. 19년 만에 시작한 K-life가 계획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2014년의 봄부터 16년 가을 사이 베를린을 떠올리며 난 또 예상치 못한 전개를 기대하게 된다. 앞으로 난 또 어떻게 만들어져 갈까. 후진 게 매력이라고 말해온 베를린이란 도시처럼, 내 삶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끝없이 찾아오고, 그들을 통해 낡은 곳은 허물어지고 보수되어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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