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때 즈음 불의의 사고로 앞니 두 개를 한 번에 잃었다. 집 앞에서 동네 친구 녀석들과 자전거 레이스를 하다가 벌어진 참사였다. 페달을 밟고 선 자세로 있는 힘껏 폭풍 라이딩을 하다 결승선에 가까워졌을 때쯤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걸 왜 마지막에서야 알았던 건지, 지금 와서는 알 수가 없다.
이대로 직진하면 2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발로 제동을 걸었지만 가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내동댕이. 몸이 붕 떴던 순간이 불분명한 이미지로 남아있고 그다음부턴 아무 기억이 없다. 엉엉 울면서 집에 갔겠지. 엄마는 깜짝 놀랐겠지. 아스팔트에 얼굴이 많이 긁혔고 앞니 둘 중 하나는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는데 다른 하나가 이대론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애처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게 기억난다. 지금 떠올려도 머릿 털을 쭈뼛 서게 하는, 신경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통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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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이런저런 자잘한 상처를 몸에 수집해왔다. 어쩌다 각막에 스크래치를 내서 일주일 동안 어두운 방에 누워있었던 적이 한번 있었다. 고등학교 땐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선반에 코를 세게 부딪혀 코주부처럼 코가 부풀었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도 이따금 아침에 일어나면 건조해진 눈이 견디지 못하게 따가울 때가 있고, 자세히 보면 코뼈 윗부분도 미세하게 돌출되어있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는 몸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사고라기보단 자업자득으로 얻은 창피한 상처도 있다. 나 어렸을 적 소말리아를 돕기 위한 ‘사랑의 빵’이란 저금통이 있었는데 (사진 참조 - 정말로 식빵 모양의 저금통이었다.) 당시 고무 건담 뽑기에 미쳐있었던 내게 50원, 100원도 아닌 500원짜리로 가득한 이 저금통은 번쩍이는 금광처럼 보였던 것이다. 저금통이 꽉 차서 아무리 흔들어도 동전이 나오질 않아 커터칼로 구멍을 넓히려다가 손이 미끄러졌고, 그대로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를 호쾌하게 가로질렀다. 악.. 그 와중에 엄마한테 혼날까 봐 울지도 않고 휴지로 피를 닦은 걸 보면 그게 잘못된 행동이란 건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다만 그 죄책감은 부모님의 돈을 탐한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고 식빵 모양의 저금통이 상징하는 더 큰 것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때 저금통에 스티커로 붙어있던 소말리아 어린이와 얼핏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응급처치를 잘못한 탓에 큰 흉터로 남게 된, 죄책감으로 덧난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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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상처 중 그 어떤 것도 나의 앞니만큼 계속되는 ‘현재’의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사고 이후 의사 선생님께선 수십 년 후 몸이 성장했을 때를 고려한 크기의 앞니를 만들어주셨는데, 그 결과로 앞니 둘만 갑자기 세월을 뛰어넘어버린 유년기 나의 얼굴. 그 치아 두개의 엄청난 존재감이란.. 매일 나가서 공차고 뛰놀던 나의 얼굴은 씨꺼멓고, 커다란 앞니는 그와 대비를 이루며 지나치게 하얗다. (<아기공룡 둘리> 속 ‘마이콜'이 떠올랐다면 정답입니다..) 거울을 보면 이빨 밖에 보이지 않는 내 모습이 흡사 무슨 이빨괴물, 이빨맨.. 적어도 또래 남자애들보다 조금 일찍부터 외모에 민감했던 내 자의식 속에선 그랬다.
내게 새 치아를 선물해주신 선생님께선 조금 부족한 미적 감각의 소유자였거나 혹은 내 몸의 성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예상했던 게 분명하다. 나머지 치아와 얼굴 등의 성장이 끝난 이후로도 앞니 둘만 여전히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얼굴의 크기가 선생님의 기대만큼 커지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초등학교 5,6 학년쯤 이후 사진들을 보면 한결같이 입을 꾹 다물고 다소곳히 웃는 모습뿐. 허물없는 친구들과 마음껏 웃고 즐거워할 자리에서조차 필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이건 입만 벌리면 드러나는 곳에 있다는 이유로 부러진 지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아물지 못한 상처.
자의식이란 건 내면화시킨 타인의 눈 같은 것. 다행히 너무 늦기 전에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많은 경우 그 ‘눈’은 내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 천개의 눈엔 천개의 다른 내가 있다. 나라는 사람의 극히 일부만 보고도 그걸 실상보다 훨씬 좋게 봐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 없이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며 난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나를 컨트롤해보려는 노력의 덧없음을 생각했다.
컥컥거리며 웃어젖히고,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는 지금의 내가 좋다. (사진 앞에서 자연스러운 건 아직 좀 어렵다.) 흐트러져있으며 완벽히 정돈되지 않은 내 모습을 바라봄에 있어 조금 더 편안하고 여유가 생겼다. 이런 글을 써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완벽하게 큐레이션 된 나를 전시해야하는 소셜미디어 공간에 별것 아닌 나의 허물들을 하나 둘 꺼내놓고 싶다. 그것들을 놓고 같이 웃을 수 있을 때 나는 내가 좀 더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겐 아직도 회복을 기다리는 상처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