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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Jul 04. 2022

재치에 대하여

한 인간을 멋들어지게 만드는 수많은 덕목 중에서 유독 '재치'란 것에 끌린다. 언어에 욕심이 많은 내게 재치는 최고의 언어 예술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섬광처럼 공간의 분위기를 확 바꿔버릴 때, 그 순간의 반전, 언어적 쾌감이란! 조금 과장해 그 사람이 이성이라면 나는 사랑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한 가지 소원을 구하라 했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말했으나 나였다면 우주 제일의 재치를 구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재치에 대한 나의 마음은 단순 좋아함을 넘어 ‘숭상’의 지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보통 내면의 결핍을 가리킨다. 내 생각에도 나는 재치가 좀 모자란 사람 같다. 난 뭐든  책으로 배워보려 하는 사람. 김찬호 교수의 ‘유머리즘'이란 책까지 읽어가며 재치를 이해해보려 했으니 이미 글러먹었단 걸 알 수 있다. 짓궂은 농담이나 난처한 상황 앞에서도 내가 아는 누구처럼, 티브이에서 본 누구처럼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보통 그럴 때 사고 회로는 어김없이 마비되고 멋쩍은 웃음만 남는다. 그 웃음엔 씁쓸한 자기혐오의 뒷맛 같은 게 남아있다. 실패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저장해 집에 돌아가는 길에 돌려보기도 하며, 아 왜 그때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한심한 내 얼굴을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적 눈물을 흘린다. 아, 나는 몹시도 재치가 있는 사람이고프다..!


내가 재치라고 인식하고 있는 무언가는 내 속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한다. (‘눈치 빠른 재주. 또는 능란한 솜씨나 말씨.’라는 네이버의 납작한 정의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걸 무릎 탁 치게 명쾌한 언어로 설명해줄 어떤 책, 혹은 어떤 사람을 늘 기다린다.

이를테면 올해 초 장안의 화제였던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마지막 에피소드, 그룹 훅(Hook)의 리더, 아이키의 수상소감이 생각난다. 이날 훅은 우승 경쟁자였던 홀리뱅에게 1위를 내주며 2위로 경연을 마쳤다. 소감을 굳이 묻겠다며 애꿎은 마이크가 넘어왔을 때, 나였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생각했다. 승패를 넘어 모든 댄서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되길 추구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이왕 나온 거 1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전 국민이 보는 오디션 프로에 출연해본 적은 없지만 그간의 삶을 통해 어렵잖게 유추해볼 수 있다. 분명 사고 회로는 정지상태가 되고 머릿속이 하얘졌을 것이다. 왜? 사실 난 지금 너무 아쉬운데 그 마음을 부적절하게 드러냈다간 분위기가 어색해질 걸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나는 타인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 있는 이 내 마음의 작은 동요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그걸 감추려 애쓰는 모습도 보이기 싫다. 마치 거울 속 내가 또 다른 거울을 통해 무한히 확장되어 펼쳐지는 것 같은 자의식의 감옥처럼. (부연설명을 하자면 내가 타인의 칭찬을 어쩔 줄 몰라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칭찬이 힘든 게 아니라 ‘기뻐하는 나를 상대방이 알아채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근데 그걸 의식하는 내가 또 싫은… 자기혐오의 무한루프를 끊어준 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마법.)


이날 유쾌했던 아이키의 인터뷰에서 내가 생각하는 '재치'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다. 함께 수고한 팀원들에 대한 애정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승자를 아낌없이 축하해주는, 더 나아가 이 프로그램이 모든 댄서를 위한 축제의 장이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피날레였다. 검색 결과, 기자들은 그가 생방송 중 사용한 비속어 <‘졸라'멋있다!>에만 주목한 듯 하지만 내겐 그마저도 재치라고 느껴졌다.


드문드문 내 삶에 찾아오는 이런 순간들을 관찰한 결과, 재치가 작동하기 위해선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 같다. 첫째, 적당한 ‘선'에 대한 이해 - 이 순간 어디까지가 유쾌함 혹은 불쾌함의 영역인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그 경계선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습득된 보편적 상황에 대한 인식능력에 더해 지금 처한 상황의 특수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실로 고도의 인지능력이라 할 수 있다. 나로 말하자면 이 첫 번째 능력은 좋은 편이라고 믿는다. 최소한 상황에 맞지 않는 언행으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 기억은 없으며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에 대해서도 섬세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두 번째가 어느 정도의 ‘거침없음’이다. 내가 본능적으로 인지한 선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선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할수록 청중에게 큰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치의 순간은 일종의 곡예, 도박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경계선 안쪽에 여유롭게 자리 잡길 선택하면 그건 어떤 마법도 일으키지 못하는 그저 ‘듣기 좋은 말'로 끝날 것이다. 나의 문제는 재치에 대한 욕심, 말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다. 욕심이 과해서 거침없어야 할 때 머뭇거리게 된다. 내가 관찰한 바, 재치의 소유자들은 과도한 자의식으로부터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유해 보였다.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할 때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물 수 있고, 가지고 있는 언어감각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작동원리만 보면 농담이나 유머 같은 것들과 비슷한 순발력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재치엔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 사람이 쌓아온 삶의 무게가 순간과 만나 일으키는 화학작용 같은 것인데, 미안하지만 나도 그게 뭔지 아직 잘은 모르겠다. 내면의 단단함? 사연 있는 인생? 일단 인간 내면의 신비라고 해두겠다.( AI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재치를 보여줄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생의 의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재치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것과 나 사이 닿을 수 없는 거리만 분명해진다.  어느 날 이런 나의 하소연을 듣던 친구의 한마디, ‘그건 타고나는 것 같아'에 나는 또 한 번 내적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이런 결핍을 동력 삼아 글을 쓰고 있다. 순발력이 필요한 (음성) 대화와 달리 내 템포로 말할 수 있는 글쓰기를 통해 가끔 재치 있는 흉내를 내는 호사를 누린다. 드물게 내 글에서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발견해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어깨너머로 지독히 부러워하다가도 어느 날 쓰기 위해 랩탑 앞에 서면 괜히 믿고 싶어 진다. 내겐 글쓰기가 있고, 어쩌면 내년, 내후년엔 조금 덜 애써도 될 것이며, 그만큼 내가 되고 싶은 나에 가까워질 거라고. 벼락을 맞아 후천적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 이상 난 앞으로도 누군갈 부러워하며 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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