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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Mar 08. 2023

교회오빠라는 말

섹시함, 무해함, 귀여움

나는 섹시하지 못하다.


몇 주 후면 2주년을 맞는 한국 생활, 그간 나를 관찰한 친구들에 따르면 그렇다. 지난 한 해, 양적으론 부족함이 없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사계절을 통과해 간 소개팅들에 대해 나온 말,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 섹슈얼한 긴장감이 없다. 너무 잘 정돈된 느낌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겉과 속이 같아서 예상 외의 매력이 없을 것 같다, 등. -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말로 표현했지만, 난 이 모두를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인다. 처음 들었던 날은 (글로 옮기니 다소 순화된) 그 직설적 표현에 흠칫 놀랐지만,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라 금방 수긍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 나름의 억울함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연애 시장에서 내가 보유한 매혹 자본이 부족하다는 말처럼 들렸고, 내 나이대 남성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소양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자격지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 미니쿠퍼에 대해 쓴 글에서 이야기했던 내 자격지심과 비슷한 맥락 말이다. ‘설익음’이라 써진 포스트잇이 휘리릭 날아와 내 이마에 턱 붙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난 생각한다 -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뀐 이래 연애 중이었던 시간이 모두 반년뿐인 게 내가 관능적이지 않아서는 아니야. 상대에게 매혹됨에 있어 그런 종류의 텐션이 덜 중요한 사람도 있지. 내가 호감이 가는 이성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너희들은 본 적이 없다. 이게 전부 인스타그램으로 만들어진 대외적 이미지 때문이다. 나는 매일 책 읽고 글만 쓰는 초식남이 아니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과 있을 때 분위기만 잘 잡히면, 눈빛 싹 바꾸고.. 한다면 하는 사람….. 이 아니었다. 그렇다. 지난 2년을 돌아보니 너희의 말이 다 옳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기 때문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섹시하고 싶은가? 매력 자본도 다다익선이니 바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구글에 ‘섹시해지는 방법’ 을 쳐보니 최상단에 위키하우에 등록된 글 하나가 보인다. 내가 평상시에 이런 거나 검색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그나마 흥미로웠던 문단을 인용하자면, 섹시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론 일시적으로 파트너를 유혹하기 위한 전통적 섹시함이며, 두 번째는 내재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자연스러운 섹시함. 즉, 전자가 ‘기술’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시간과 함께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매력인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식의 분류는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친구들이 언급한 건 ‘전통적 섹시함’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외엔 ‘눈을 사용한다’, ‘약간의 미스테리를 가져라’, ‘목소리를 살짝 낮게 깔고, 느리게 말한다’ 등 죄다 쓸모없는 팁뿐, 이런 거 백날 봐야 소용없고, 나는 내가 ‘전통적으로 섹시’ 할 수 없는 이유를 잘 안다. 그건 내가 늘 망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 망설임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나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전체를 거쳐 30에 이르기까지 나를 만든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교회 오빠다.

과거형으로 쓸까, 현재형으로 쓸까 고민이 많았던 이 한 문장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흔히 한국 문화권에서 밈처럼 사용되는 전형적 ‘교빠’의 의미도 있지만, 또 내가 살아온 고유한 삶의 맥락 속에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오빠에도 종류 같은 게 있다면 나는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여러분의 에버리지 교빠라기보단 허슬러에 가까웠을 것이다. 보통 교회엔 앞에 나가 기타 치며 노래하는 워십리더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진 참조), 나는 이걸 내가 다니던 교회뿐만 아니라 런던 캠퍼스 연합, 교회 연합, 심지어 유럽 전체 집회에서까지 맡아 사실상 전도사와 다를 바 없이 10년을 살았다. 드럼을 치거나 싱어를 했던 시간까지 합치면 15년. 자기 건물에 장비가 세팅된 보통의 한국 교회와 다르게 내가 다닌 런던과 베를린의 교회들은 단 한 번도 우리 건물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번 풀밴드 수준의 악기와 장비를 싣고 나르고, 풀고, 정리한 15년의 허슬링이었다. 고통에는 자기 강화적인 습성이 있어서, 나는 몸이 고될수록 더욱 내가 속한 세계와 맡은 역할 속으로 몰입했다. 물론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늘 시달리던 비주류의 느낌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인 교회는 내 가치가 인정받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교민 사회란 곳, 사회학적 관점에서 꽤 흥미로운 장소다. 영국은 유럽 기준 한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지만 (2019년 기준 약 4만 명) 그래봐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수준의 인구가 한국보다 큰 면적에 퍼져있는 것이고, 그중 1만 4천 정도가 뉴몰든/킹스턴이라 불리는 지역에 몰려있다. 비공식적 한인타운과 같은 이 좁은 동네에 교회만 2022년 기준 40개다. 교민사회에서 교회는 낯선 타향까지 와 마음 붙일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낯선 문화, 낯선 언어에 처한 사람들이 형성한 다소 폐쇄적인 성격의 커뮤니티. 그래서 남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더더욱 많고, 황당한 일로 뜬소문에 휘말리기가 쉽다. 늘 사람들 앞에서 서는 역할이고, 부모님도 다니시는 교회였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면 안된다는 강박 속에서 십수 년을 살아왔다는 것, 그게 얼마나 이상한 환경인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체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회 오빠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친절’ 같은 게 아니라 ‘무해함’이다. 그는 늘 성-속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한 줄다리기 중이지만 보통은 자기 욕망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 (교회 오빠의 특권을 유지하면서 욕망에 충실하여지려는 순간 그는 여자친구 둔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존재, 무해한 개새끼가 된다) 앞서 내 친구들이 말한 ‘너무 잘 정돈된 느낌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는 아마 이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나는 삶의 공적 영역을 사적인 관계에까지 체화시킨 사람이었고, 늘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해서 남의 눈으로 날 검열하는 데 익숙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섹시함이란 유머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해야 할 때 안전하게 선 안쪽에 서 있길 선택하는 사람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험해야 섹시하고 웃길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타율을 걱정한다면 애초에 모험할 수 없다.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 결국 타석에 오르는 수 자체를 늘리는 것만이 방법일 텐데, 불행히도 좁은 한인 사회 안에서도 더 좁은 교회에만 몰두하던 내겐 애초에 타석 자체가 잘 생기질 않았다)


그러다 한국에 와 아무것도 안 하고 교회엔 출석만 한지 벌써 2년이다. 예전엔 일요일 예배 시간을 지킴에 있어 ‘목숨 건다’라는 비장한 표현까지 썼던 걸 생각하면, 요즘 나는 많이 풀어졌다. 코로나를 거치며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행동하려 애쓴 모든 시간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듯한 경험도 해보고, 교회 안의 ‘종교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반감도 생겨보고, 교회라는 곳과 처음으로 물리적, 심정적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게 결과적으론 나에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몇 년 전이라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나는 이런 나의 풀어짐이 조금 더 계속되길 바란다. 예전 교회에서 조장 같은 걸 했을 때 지금 나 같은 조원이 있었다면 나는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라며 ‘동역자’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난 신앙의 영역에서부터 잘 흐트러져 나의 삶 전체까지 그 여파가 이르길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모태 교회 오빠라 어차피 섹시하긴 글렀단 거 나도 잘 알아서, 다만 내가 조금만 덜 무해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나를 지켜봐 온 친구들이 해준 또 다른 말에 따르면, 내겐 ‘의외로 귀여운 면’도 있다고 한다. 토할 것 같겠지만 끝까지 들어달라. 나는 그걸 일반적인 의미에서 귀여움(cute)이 아니라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이 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상대도, 상황도 맞아야 드러나는 나의 느슨한 모습이 강박의 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쑥스러워 말하진 못했지만 내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기뻤던지. 무해한 교회 오빠라는 가면으로 한번 가린 나를 인스타그램이라는 필터가 또 한 번 왜곡하니 편안함에 이르기 참 쉽지 않다. 오랜만에 인스타 개인 계정 피드를 거슬러 올라가봤다. 기타치고 노래하는 내 모습이 보여 어색해졌지만 그대로 두기로했다. 섹시하진 않지만 이상하고 귀여운 30대 아져씨가 앞으로 나아갈 길인 것인가, 그렇다 치고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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