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백수 Mar 31. 2020

쉐킷쉐킷

시와 희곡 vol.3

쉐킷쉐킷


강백수


아침에 눈 뜨자 마자 그 애가 없다는 게 다시 실감났어

나는 생각했지 더 이상 이 공간에 머물 수 없겠어

그렇다고 그 애 때문에 짐을 싸고 여길 뜬다고?

하나라도 더 잃었다간 그나마 눈 뜨는 것조차 어려워질 것 같은데


무엇도 버리지 않고 무엇도 보태지 않고, 

지금부터 나는 모든 사물의 배치를 뒤섞는다

테이블은 주방으로 

냉장고는 옷방으로

서랍장은 침실로

5월은 2월로

3월은 지난주로

겨울은 가을과 여름과 봄을 지나 다시 그 전의 겨울로

마지막 그 말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어떤 시간의 틈새로

무엇도 원래 있던 자리에 머물지 않도록


빈 종이컵 두 개와 콩알이 든 종이컵 하나를 뒤섞듯

공간과 그것을 메운 가구와 시간과 그것을 메운 기억을 뒤섞는다

쉐킷쉐킷

쉐킷쉐킷

그 어떤 익숙함도 끼어들 수 없도록

차라리 모두 낯설어 어떤 낯섦도 보이지 않도록

쉐킷쉐킷

쉐킷쉐킷


500리터 냉장고와 마지막 그 말이 가장 힘들었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잖아

찬 물에 꼼꼼하게 녹인 믹스커피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기를 미는 뿌듯함이여

그 깔끔함이여


의기양양한 콧노래가 2절로 향할 때 쯤

냉장고 있던 자리에서 청소기에 툭 하고 걸린

머리끈 하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멈추고 말았지

바로 그 순간 모든 쉐킷쉐킷, 쉐킷쉐킷은

킷쉐킷쉐, 킷쉐킷쉐, 죄다 무효로 처리되고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