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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Jun 10. 2020

I·SEOUL·U (강백수 시론 에세이)

<시인수첩> 2020 여름호





 매일같이 술을 퍼붓고 매일같이 아침 지하철 2호선을 타던 기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특한 사람들이 지하로 기어들어와 지하철 안에 모이면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역겨운 냄새들 사이에는 향수나 화장품 같은 향긋한 냄새들도 끼어있었습니다. 역겨운 것에 향긋한 것을 섞으면 역겨움이 증폭된다는 걸 지하철에서 배웠습니다. 향긋한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이 도시는 더 역겨워졌습니다. 앞자리 앉은 여자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핸드백에 넣으며 엉덩이를 들썩이면 그 자리를 꿰차고 앉으려고 잔뜩 무릎에 힘을 줬습니다. 딱딱한 양 옆 사람들의 어깨 사이에 끼어 있으면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학부시절 어느 날이었습니다. 늙으신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습니다. 나는 교수님께 시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시인이 시라고 쓴 게 시지.”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시를 써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어야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씀이셨을까요. 묘비에 적힌 교수님의 이름 위에는 ‘시인’이라는 두 글자가 함께 적혀있었습니다.


 운이 나쁜 날에는 제때 깨어나지 못하고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습니다. 뚝섬과 성수를 지날 무렵쯤 지하철이 땅 위로 올라오면 창 안으로 들이친 빛에 놀라 깼다가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아무 역에서나 내려 반대편 열차를 탄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숨 더 자고 일어나면 비로소 열차 안은 조금 한산해져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노트를 꺼내어 무릎위에 펼치고 어젯밤 범람하던 역겨운 풍경들을 받아 적었습니다. 술이 덜 깬 아침에는 그다지 안 좋은 일이 없어도 기분이 더러웠습니다. 다시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면 꼭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습니다. 학교 벤치에 앉아 메로나를 먹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인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심한 인간에게 햇살이 내리쬐면 그는 더욱 한심한 인간이 됩니다. 이러한 공정을 수없이 거치며 나는 비로소 시인이 되었습니다. 


*언어는 확실히 불완전합니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주차문제로 다투는 이웃들의 유쾌하지 않은 고성에 잠이 깨어 역류성 식도염으로 인한 헛구역질을 해대는 기분-과 일대일로 완벽히 대응하는 단어는 한국어에도 영어에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되는 일 하나 없는 시절이라며 그 짜증을 연인에게 쏟아낸 채 자고 일어나 느끼는 기분-같은 것도 말이지요. 이러한 언어의 한계로 인해 누군가는 C코드 D코드 뚱땅뚱땅거리고 누군가는 무슨 시루떡같이 생긴 그림을 예술에전당에 걸고 누군가는 시를 쓰고, 아무도 이해 못할 말들을 짓고, 자기도 자기가 뭘 썼는지 모르고……. 뭐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어떤 것들은 일상언어로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마저 참신하게! 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나는 가끔 쑥스러울 때가 있어요. 여성스러운 꽃무늬를 페미닌한 플라워 패턴이라고 이야기하는 TV속 어느 패션디자이너 흉내를 내는 것 같달까요. 나는 그냥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주차문제로 다투는 이웃들의 유쾌하지 않은 고성에 잠이 깨어 역류성 식도염으로 인한 헛구역질을 했다고, 되는 일 하나 없는 시절이라며 그 짜증을 연인에게 쏟아낸 채 자고 일어났다고 쓰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시를 쓰기 참 좋은 곳입니다. 나는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악취 속에서 미세먼지 속에서 바이러스 속에서 전날의 숙취를 어설프게 감추고 굿모닝!을 외칩니다. (그 어설픈 균열이 얼마나 시적인가요)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로또를 사고, 로또를 안 사는 사람들도 로또 당첨을 꿈꾸는 이 도시에서 나는 어젯밤 범람하던 역겨운 풍경들을 떠올립니다. 아차, 가만 생각해보니 영 역겹기만 한 것은 아니었네요. 그 와중에 나는 후미진 어느 구석에서 어떤 여인과 키스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겨운 것에 향긋한 것을 섞어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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