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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Feb 04. 2022

불확실한 미래에 소확행으로 응수하기

소확행 IN RUSSIA

임신, 출산, 육아는 내가 겪은  어떤 일보다 힘들다.


- 대학교 4학년,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한답시고 남들 취업할  졸업을  학기 유예하고 백수 생활을  

- 어찌어찌 경제지에 입사했다가 생각했던 언론인의 삶과 너무 달라 그만두고 다시 백수가 됐을 

- 내가 좋다던 남자와 사귀었는데, 얼마   남자한테 대차게 차였을  ( 연애에 젬병이다)


언뜻 생각나는  인생의  차례 고비와 지난해부터 이어진 육아, 출산 그리고 지금 상황을 비교해본다.

이런... 비교가  된다.


이전의 고비들은  중심에 내가 있었는데, 임신-출산-육아(이제부터 줄여서 임출육으로...;;;) 에는 내가 없다.

아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위기의 원인도 해결책도 아기에게 고, 나는 시작도 끝도 모르는 육체적/정신적 노동에 언제고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더 힘든 건,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이건 내 경우가 특히 그런데,

올해 말까지 육아휴직을 하고 여기 러시아에 오긴 했지만,

 이후 과연  돌이 지난 아기를 한국에 데려가서 혼자 키울  있을 것인가,

복직을 포기한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내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손에 잡히지 않는 고민들이 힘든 일상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



임신 17주 차, 러시아에 온 이후로, 넌 한 번도 행복하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얼마 전 남편과 싸우고, 서로 화가  누그러진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이  말이다.


나는 지금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행복하지 않은 절대 아니다.


젖을 물고 있는 아기를 보면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행복하다

이제 옹알이를 시작해서 '아구, 오구, 아보 보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입을 달싹이는데, 그러다 가끔 '엄마'와 비슷한 소리가 나면 몸속 모든 장기가 두근대는  같다.


러시아 생활도 생각해보면 좋은 점이 참 많다.

한국보다 물가가 싼 덕에 한국보다 조금 더 쾌적한 집에서,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으며 아기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기를 데리고 주말에 잠깐 나들이를 가면 여행  기분에 들뜨기도 한다.


 일상에는 분명히 행복할  있는 요소들이 많은데,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인 남편이 보기에 나는 우울과 짜증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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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새벽에 아기 수유를 하고 깜깜한 방에 앉아서 남편의 말을 곱씹었다.


더 이상 불행해 '보여서'는 안된다.

그런 나를 보는 남편은 무기력해질 것이고, 그런 남편과 살며 나는 종국에는 온몸으로 불행을 발산하게   분명하다.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임출육이 가져온 불확실한 미래에 내가 지금 느낄  있는 기쁨과 행복을 저당 잡히지 말자


내가 어떤 태도로 현실을 살든, 내 미래는 당분간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즐기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정말이지 노력이 필요하다.


소. 확. 행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 처음  말을 들었을 때는 왠지 낯간지러웠다.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색함,

그리고 소박과 확실이라는 말은 작고 가성비 떨어지는 물건들을 팔려는 명품 업체의 가식 같았다.


그런데 새삼 이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정신없이 끌려다니는 초보 엄마의 일상에서

적어도 하루에 하나씩은 내가 '그래 이거지' 하고  돌릴  있는 무언가를 해야겠다.


이를테면.


- 이제 아기가 100일을 넘기며 소화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그간 아기를 위해 참았던 커피 라테 혹은 러시아에만 있는 라프 커피(우유, 바닐라 시럽, 에스프레소가 들어간 러시아식 바닐라라테. 정말 맛있다) 먹기 (아기를 위해 양심상 숏 사이즈로...)

- 러시아만의 디저트, 꿀 케이크 메도빅과 나폴레옹을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맛있는 제과점에 가서 사 먹기

- 무알콜 맥주와 감자칩 먹기

- 프로젝터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무념무상 누워있기

- 러시아의 예쁜 그릇을 사기 (러시아 그릇들, 의외로 심플하고 예쁘다)


러시아 사람들도 생각해보면 소확행을 추구한다.


주말 낮 1-2시까지, 러시아 길거리를 한산하다.

금요일에 모두 미친 듯이 술 마시고 놀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브런치' 즐기는 부지런한 젊은이나, 일찌감치 아이를 데리고 나와 나들이를 빙자한 박물관 체험학습을 나오는 가족은 거의 없다.


금요일은 내일이 없는 듯 술을 진탕 마시고 노는 것.

러시아의 소확행이다.


부지런한 한국인 천성이 있어, 러시아 사람처럼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일 일은 '에라이' 내일 걱정하고, 현재를 즐겨보기로 하자.


 며칠 소확행의 기록을 덧붙여본다.


* 남편에게 퇴근길에 사 오라고 시킨 러시아 디저트 프랜차이즈 'UDC'의 컵케이크 (러시아 물가 치고 비싸다. 주먹만 한데 한개에 5천 원 정도?)

* 집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로컬 베이커리의 빵

*집 뒤, 눈 쌓인 호수가 산책

*무알콜 맥주 한 잔




앞으로 종종 러시아에서만 즐길 수 있는 작고 확실한 행복에 대해 종종 기록으로 남겨볼 예정.



물론 그럼에도 나는 ' 인생 어쩌지'라며 때때로 (혹은 빈번히) 우울해하겠지만,

그럴 때면  기록들을 보며, 현실의 소중함을 곱씹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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