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러시아 모스크바에 온 지 1년이 넘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는...
모스크바에 오기 전, xx스쿨에서 인강을 들으며 공부하던 그 수준에서 새끼손톱만큼 늘었다.
매주 한두 번씩 러시아어 과외를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처음엔 러시아어를 처음 배우는 것 치고는 훌륭하다며 날 칭찬해주던 칭찬봇 과외 선생님도 요즘엔 말수가 줄었다.
과외시간마다 예외 없이 버벅대는 나를 보며 쓴웃음만 지을 뿐.
창피한 일이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러시아어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난 중국어를 꽤 한다. 대학 때 8개월 정도 중국 교환학생을 다녀온 경험으로 육아휴직 전까지 중국어를 쓰는 업무를 해왔는데, 대부분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고, 중국인 파트너들은 내가 중국에 8개월 있었다고 하면 아주 놀라곤 했다(물론 예의상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난 내가 언어 습득에 평균 이상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러시아어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아... 러시아어...
어느 정도로, 왜 어려운가 설명을 해보자면.
일단 유럽 여느 나라 언어처럼 여성명사, 남성 명사 명사에 성이 있다.
단어의 '성'에 따라 형용사, 수사 등 수식어의 어미도 바꿔줘야 한다.
여기까진 뭐... 외워줄 수 있다.
더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단어가 주어냐, 목적어냐, 그 쓰임에 따라 단어의 형태가 끝도 없이 변한다는 거다.
우리나라 말이나 영어는 어순으로 문장 성분을 구분하는데, 러시아어는 단어 자체를 바꿔줘야 그 뜻이 통한다.
예를 들어, 한글에서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쓰든 '많은 사람들'이라고 쓰든 '사람'이라는 단어는 변하지 않지만
러시아어에서는 '사람'이란 단어를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따라 형태를 바꿔줘야 한다.
(사람을 주어로 쓰면 '류지', 수식을 받으려면 류제이... 대충 이렇게 바뀌는 건데, 대충 설명하는 것조차 어렵다)
단어의 '격'은 또 얼마나 많은지..
소유격과 비슷하지만 소유격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 격
'-에게'의 위치에 보통 쓰이지만 수만 가지 예외가 있는 여격
목적격과 비슷한 대격 등등.
총 6가지 격이 있는데 한글, 중국어, 영어의 문장 성분 정의로는 당최 설명할 수 없다.
더 아찔한 건, 고유명사나 사람 이름도 문장 성분에 따라 변화시켜줘야 한다는 것.
아니, 고유명사를 왜! 왜 그 고유성을 바꾸려드냔 말이다
그리고 어려운 언어가 대부분 그렇듯, 수많은 예외가 있다.
'이건 예외야. 그냥 외우는 수밖에 없어'
내가 러시아어 과외시간마다 선생님께 항상 듣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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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가 외국인에게 이렇게나 어려운데,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은, 특히 공무원들은 영어나 바디랭귀지 혹은 하다못해 번역기라도 사용해서 외국인도 소통할 노력을 해주지 않는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내가 서툰 러시아어로 아무리 '전 러시아어를 못합니다'라고 해도, 전혀 굴하지 않고 러시아어로 할 말을 이어간다.
얼마 전, 러시아에 온 뒤 처음으로 한국에 잠깐 들어가느라 공항에 갔었는데, 수화물 검색대에서 우리 부부를 불렀다.
검색대에 걸린 건, 이럴 수가... 30킬로가 넘는 이민가방이었다.
공항 공무원이 가방 엑스레이를 보면서 8비트 랩 수준으로 러시아어를 시작했다.
대충 뭐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인데...
배터리도 없었고, 금속류도 없어서 어리둥절해하며 번역기로 뭐가 문제인가를 물어봤으나, 황당하게도 번역기 사용을 거부!
나도 화가 나서 '러시아어를 못한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느냐, 아니면 번역기에 말해라'라고 언성을 살짝 높여봤으나, 공항직원은 요지부동으로 러시아어 폭탄만 쏘아댔고, 결국 우리는 30킬로짜리 이민가방을 뒤집어서 탈탈 털고 나서야 선물로 샀던 전자담배가 문제였단 걸 알았다.
이렇게 불친절한 일부 러시아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더 어렵게 만든다.
내가 주로 부탁해야 하는 입장에서 만나는 러시아 사람들, 공무원이나 아파트 경비 아저씨, 수리업체 직원, 우체국 직원 등등은 열에 아홉은 속사포로 러시아어를 쏘아대고, 당혹스러워하는 나를 보고도 전혀 아랑곳 않다가 이내 나와의 소통을 거부해버린다.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이 많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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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외국인과의 소통에 불친절하고 방어적인 러시아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며칠 전 있었다.
나의 문법 파괴 러시아어를 잘 알아들어주는 키르키지스탄 출신 베이비시터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한국인은 제2외국어로 영어를 배우지? 우린 제2외국어가 러시아어야"
그랬다.
러시아어는 중앙아시아 많은 국가에서는 영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게 배우는 이른바 '대국의 언어'였다.
내가 미국 공항에 가서 왜 한국어나 중국어로 말해주지 않냐고 따진다고 생각해보자.
미국 직원이 콧방귀나 뀌었겠냔 말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에서 러시아어는 영어처럼 통용되는 표준어다.
여기 러시아에 살면서 1년 넘게 러시아어 입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며 러시아 사람들에게 영어를 요구하는 내가 어쩌면 아주 안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더 절실한 마음으로 러시아어를 배워봐야지'
라고 다짐해보지만...
출산 후 급감한 기억력, 여유 시간이 생겨도 꾸벅꾸벅 졸게 되는 저질 체력과 정신력으로 이 다짐을 실천할 수 있을는지.
다짐하는 이 순간, 나는 벌써 조금 포기를 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