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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Sep 08. 2022

다모이( дамои. 우리말로 '집으로')

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우리 집 아기가 100일을  지난 무렵부터 매일 6시간씩 집안일과 아기를 돌봐주던 내니가 일을 관뒀다.

그러니까 어언 8개월 만이다.


내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스물네 살의 그녀는 의상 디자이너가 꿈이어서 모스크바에서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지병이 있는 아버지만 고향에 두고 어머니, 그녀의 언니, 그녀까지 모스크바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그녀는  잠시 접고 우리 집에서 내니 일을 했다.


처음에는 애도 없는 이십 대 어린 친구가 아기를  봐줄까 싶었는데, 모든 일이 그렇듯 육아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나 보다. 

그녀는 아기를 너무  봐줬고,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아기 앞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나와는 달리 하하호호 아기와 얼마나  놀던지.

아기가 나보다 내니를  좋아하는  아닐까 싶어 그녀한테 경쟁심, 아니 경계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당장 몇 주 뒤에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했을 때

'네에??? 빠치무(왜요? 라는 뜻이 러시아어) !!!' 우리말과 러시아가 섞인 외계어가 그야말로 말마처럼 튀어나왔다.


그녀의 '빠치무'를 들어보니 더 답답해졌다.

요즘 러시아에서 이른바 '탄 국가'(우즈베키스탄, 키르키지스탄... 등 러시아 주변 중앙아시아 국가들) 국민에게 거주비자를 잘 내주지 않아서 비자 만료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였다.


러시아에는  국가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많다.

베이비시터나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부터 택시기사, 건물 청소, 학교 스쿨버스 기사 등등.  같은 주부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러시아인보다  국가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런 이주 노동자는 매년 한 번씩 거주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데, 그것만 하면 러시아에서 자유롭게 일자리를 구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가 직장에서 이주민 신분 증명 같은 것을 해줘야 러시아에서 일할  있게 해 주겠다고 비자정책을 바꿔버렸다.

개인 가정이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경우 당연히 신분 증명이 불가능하고, 나의 내니 같은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다.

내니가 일을 그만두는 날, 나 역시 러시아에 잠깐 머무는 입장이니 무덤덤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작은 비닐봉지에 일할 때 입었던 티셔츠를 챙겨 나와 그간 고맙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보는 내니 앞에서 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나눈 대화라봐야

'기저귀 좀 갈아주세요', '아기랑 잠깐 놀아주세요', '아기랑 산책 다녀오세요.'

정해진 몇 가지 말 외에는 사적인 대화는 전혀 하지 못 했는데(정말 못 한 거다. 진전 없는 내 러시아어로 사적 대화는 택도 없다)

 은근히 그녀에게 기대고 있었나 보다.    없는 이곳 러시아에서 아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공유할  있는 남편을 제외한 유일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녀에게 물리적으로는 물론 감정적으로도 의지하고 있었다.


둘이서 한바탕 울어 재끼고 러시아 다시 돌아오면  연락 달라고 하며 내니를 보낸 , 다듬기 귀찮아서 냉장고에 넣어뒀던 콩나물을 꺼냈다.

이미 시들해진 콩나물의 머리, 꼬리를 다듬는데 주책맞게 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콩나물을 다듬었다. 내 평생 그렇게 깔끔하게 콩나물을 다듬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내니한테 러시아 전통 수프 '보르쉬' 만드는 법을 배우기로 했었는데, 그것도 못 배웠네.

짜리 몽땅 몸통만 남은 콩나물로 국을 끓이면서 다시 또 눈가가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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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갑자기 비자 정책을 바꾼 이유는 역시나 자국민 일자리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외국계 기업, 공장들이 러시아를 떠나 실업자가 많아졌으니 자국민 일자리 확보가 필요하단 것. 게다가 나라를 보수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전시 상황이니 이주민들이 비자 문제로 자의 반 타의 반 러시아를 떠나게 하겠다는 거다.


이런 정책이 비단 러시아만의 선택을 아닐 거다. 전쟁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물가,  실업률이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니 같은 이별을 경험하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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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니가 떠난 지 일주일 . 우리 아기는 그렇게 따르던 내니 언니의 부재를 느끼고 있을까?

아기가 내가 내니에게 아기를 맡기고 번역일을 하던 오후 서너 시쯤만 되면 유독 칭얼대는  보면,

 시간,  내니 언니와,  재미를 기억하는  같기도 하고,


9 1일이 되자 황당하리만치 모스크바 날씨가 추워졌다.

아직 중앙난방이 가동되려면 아직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내니가 없는 집이 왠지  성글하고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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