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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Feb 10. 2023

출근길 하이재킹

시댁 이야기

얼마 전 경차를 샀다

직장 다니는 엄마에게 아기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밤에 찡찡대면 태우고 드라이브도 할 수 있는 이동수단은 필수라는 보육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나서였다


그런데 요즘 그 경차는 시아버지가 더 자주 쓰신다. 아기가 어린이집에 입학하는 3월까지 일주일에 두 번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와 놀이수업을 가는데 그때 나의 경차로 아기를 태워다 주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오래된 세단 차량을 가지고 계시는데 최근 급격히 공간감각, 인지력이 떨어지시는 것 같다며 경차로 차를 바꾸고 싶다고 하시던 차에 내가 경차를 뽑으니 일단 테스트 삼아 몰아보시겠다는 거다.


나야 이유가 어찌 됐든 감사한 일이었다. 일흔을 바라보시는 시어머니께 아기를 맡기며 문화센터에 놀이수업에... 시킬 건 또 다 시키겠다고 욕심부리는 게 죄송했는데 시아버님이 오고 가는 수고를 덜어주신다니 ‘내가 시아버지 덕보는 일이 있네 “ 싶었다


하지만 사건사고는 어김없이 찾아왔으니...


아버님이 새 차 드라이브에 재미를 붙이시고 말았다.

오늘은 어디 라이딩할 건수가 없나... 호시탐탐 운전대 잡을 기회를 노리기 시작하신 것


가랑비가 내리던 며칠 전 아침. 출근 준비에 정신이 없는데 아버님이 현관을 두드리셨다.


”비 오니까 내가 회사 데려다줄게! “


’ 이다지도 자상한 시아버지라니 ‘ 하는 뿌듯함으로 아버님 얼굴은 상기돼 계셨다.


나의 회사는 충무로에 있다. 서울역 남대문 명동, 그 복잡한 시내를 뚫고 가야 해서 차로 가자면 도처가 사고 위험 구역이다. 대중교통이 훨씬 더 안전하고 빠르다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운전 경력이 몇 년인데! 내가 다 가봤어, 충무로!! “하시며 나에게 살짝 역정을 내신다.


앞서 본인께서 요즘 공간감각과 인지력이 떨어져 운전이 어렵다고 하셔 놓고!! 우리 아파트 주차장을 나가실 때면 매번 같은 지점 보도블록을 타고 내려오시면서!!


설왕설래 실랑이 끝에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주시는 걸로 합의하고 차를 탔다.


그런데 아파트 입구 앞에서 갑자기 지하철역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트시는 거다


“딴 말 마라. 오늘은 충무로 간다!”


비행기 하이재킹을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깜빡이도 켜지 않고 비보호 좌회전 구간을 넘나드시는 아버님 옆에서 나는 높아지는 목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아버님 저 늦어요, 이러면 늦어요” 하며 인정을 호소했다.


그럼 서울역까지, 삼각지까지 가겠다, 협상을 걸어오시는 아버님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가던 길 지하철역에 내렸다.


“쓰읍... “

지하철역으로 뛰어내려 가는데 아버님의 서운함이 내 등을 노려봤다.


그날을 아버님은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까.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며느리를 회사에 데려다주는 선행을 베푼 날?

며느리가 본인의 호의를 받아주지 않아 서운했던 날?

드라이버로서의 건재함을 확인한 날?


아버님께 그날이 어땠던지 간에

나에게는 유사 하이재킹 경험을 한 공포스러운 날이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아직도 내 차 키 두 개 중 하나는 아버님께 있고, 아버님이 마음만 먹으시면 언제든 그걸 들고 우리 집으로 건너오실 수 있다는 것.


오늘 아침, 비가 왔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며 이 글을 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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