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긍정민 Jan 31. 2023

불편한 연대

시댁이야기

시댁 명절 에피소드.


며칠 전까지 난 준 싱글맘이었다.

1월 초, 나의 복직과 동시에 남편이 러시아로 출장을 갔다. 출장기간은 무려 3주. 설 명절에서 남편은 러시아에 있었다

그러니까 난 남편 없이 15개월 아기를 데리고 시댁식구와 굽이굽이 민족 대명절 고개를 넘어온 거다


사건사고가 없을 리 없다


명절 첫날. 시댁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고, 아기 때문에 난 시부모님을 매일매일 본다


그런데 아버님이 연휴 첫날밤을 아버님이 굳이 아기랑 둘이 자고 가라고 하시는 거다. 전통과 예를 중시... 하신다고 하기엔 며느리 이름을 “무개야, 아무개!!” 이렇게 학생 출석 부르듯이 부르시고, 며느리 앞에서 어머님을 “야, 너” 거리시는 아버님이. 갑자기 삼강오륜의 수호자가 되신 거다. 남편의 두 형 가족으로 이미 가득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잘 방이 없는데도 굳이.


아기가 요즘 밤에 자꾸 깨고, 아기 기관지가 약해서 가습기를 틀어야 하고... 등등의 이유를 둘러대며 첫 번째 어택을 겨우 방어했다


명절 둘째 날.

아기랑 무사히 집으로 귀환한 다음날 아침. 아기님이 조찬 후 예쁘게 쾌변을 해주셔서 깨끗이 씻겨드리고 뒷정리에 정신이 없는데 아침 8시쯤 왜 얼른 안 건너오냐는 아버님의 불호령 전화가 왔다. 동서들이랑 아침 차려야 하는데 네 애 밥만 먹이고 있는 건 며느리의 도리가 아니라며 화를 내셔서 뒷정리 좀 하고 넘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를 뚝 끊긴다.


신호가 끊겼나 싶어 다시 전화를 드렸더니 안 받으시고, 어머님께 전화했더니 아버님이 받으시더니 “일부러 끊었다!” 하시는 거다.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남편과 연애시절 싸울 때도 “됐어, 그만해. 끊자!”라고 전화가 곧 끊길 것임을 예고해 줬던 것 같은데 시아버지와 통화 중 “뚜뚜뚜” 신호의 급습을 받다니.


잠시 후 시댁으로 넘어갔더니 아버님을 제외한 다른 가족이 나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아침상 치우는 것을 거드느라 부엌에 있는데 어머님이 다가오시더니 “기분 안 좋겠네” 하시며 등을 토닥이신다.


동병상련의 눈빛이었다


그 후, 어머님의 카톡이 잦다. 육아 정보도 보내시고, 내가 회사 가 있는 동안 아기 모습도 종종 보내신다. 아침저녁으로 육아 바통 터치할 때마다 아버님과의 일화도 꼭 털어놓고 가신다.


연대감을 느끼시는 모양이다

괴팍한 아버님께 억울한 취급을 당한 약자끼리의 연대감.


하지만 난 이 연대감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아버님의 행동은 횡포임에 분명한데 이걸 연대감으로 위로하겠다는 건 앞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변화는 없을 것이며 지금의 불의는 계속 없는 일인 척 넘어갈 갓이란 뜻이니 말이다


고등학교 때, 신분차별로 받은 고통을 연대와 해학으로 승화한 작품이라는 봉산탈춤 말뚝이 이야기와 민화, 시조들을 보면서 “아니 뭐 이런 물러빠진 민족이 다 있나”했었다.


물론 악소리 내면 헉소리 나게 핍박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굳이 똘똘 뭉쳐 웃음으로 승화할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그 피를 이어받아 어머님은 나에게 우리끼리 친하게 지내며 하하호호 웃어나보자 권하신다.


하지만 어머님, 웃어넘기면 정말 웃음거리가 된답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참는 연대는 건강한 연대가 아니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답답해서 그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