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돌아보는 2008년 여행
네쨋날 여행기를 시작하기 전에 설명할 게 있다.
우리가 묵었던 B&B에 대해서. B&B란 가정집을 꾸며서 객실로 만들고 키친에서 간단한 아침을 차려주는 곳이다. 가격은 지역에 따라 시설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보통 하루에 100달러~ 200달러 정도다. 호텔과 비교할 때 B&B는 소규모이고, 아기자기하고, 마치 집에 있는 듯한 가정적인 분위기가 난다. 대신 주인의 얼굴을 접하게 되므로 주인과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한번 가보는 것만 못하니 궁금한 분들께서는 직접 한번 가보시길.
그런데 우리가 고른 이날 B&B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5 에이커쯤 되는 넓은 터, 본채 하나에, 별채 하나가 딸린 이 집에는 모두 6개의 방이 있었다. 우리가 머문 곳은 본채에 딸린 곳이나 출입구는 따로 된 스튜디오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 집 주인 아들이 어렸을 때 살던 곳이라고 한다. 처음 이 방에 들었을 때 을 눈에 가장 띈 것은 문 앞에 놓인 샴페인이었다. 이슬이 맺힌 은색 얼음 바구니에 들어있는 샴페인, 야외용 테이블. 입맛이 돌았다. 예약 컨펌할 때 주인이 자꾸 정확한 도착시간을 물었는데 왜 그런가 했었다. 샴페인을 때맞춰 내놓으려고 그랬던 거다.
방 안에는 나뭇결이 보이는 책장과 책장에 꽂힌 책들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책인지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아이가 읽을만한 책들이었다. 싱크대를 열어보니 온갖 식기와 그릇들이 오롯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 집보다 더 잘 갖추어 놓았다. 워크인 클라짓에는 이 집 아이가 가지고 놀았을 아기자기한 장난감들과 여유분의 베드 용품들이 있었다. 욕실은 두 명이 들어가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에 월풀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옆에는 조개껍질, 노란색 러버덕, 온갖 종류의 샴푸와 바디워셔, 다양한 향의 로션까지. 소파 옆에 놓인 탁자에는 초콜릿과 사탕, 책장 앞에는 이 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기막히게 맛있는 술까지. 정성이 느껴졌다. 호텔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시애틀에 간다면 이 B&B를 꼭 추천해주고 싶다. 게다가 우리가 머문 스튜디오의 가격은 하루 90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주인은 50대 후반 정도의 백인 아줌마인데, 요리사다. 나중에 잠깐 나눈 대화를 종합하면 이 주인의 백그라운드는 대충 이렇다. 미국인 군인 출신 아버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모로코와 프랑스 미국 등에서 자랐으며 오랫동안 스튜어디스로 일하다 은퇴해 사업을 했으며 현재는 요리강좌를 하며 B&B를 운영하고 있다. 이 주인과 처음 전화로 예약했을 때 목소리 톤이 상당히 딱딱해서 좀 걱정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꽤 친절한 사람이었다. 톤이 딱딱한 것은 약간의 유럽식 영어 엑센트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여행을 잠시 중단하고 그 집에서 그냥 푹 쉬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그렇게 조용하고 편안한 집이었다. 이 집 설명에 너무 치중했나 보다.
다음날 아침, 스페이스 니들 (space needle)을 찾았다. 역시 GPS 덕분에 바로 찾았다. 갈 때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Sleepless in Seattle)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기대하고 갔는데 막상 직접 가서 본 스페이스 니들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본 경치는 그런대로 멋있었지만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전망대에서 본 풍경보다 못했다. 호놀룰루의 알로하 타워보다 멋있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시애틀의 마케팅 능력이 대단하다. 이런 정도의 타워를 가지고, 영화의 명성을 등에 업은 후, 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으니... 타워에 올라가는 입장료도 12달러였던가 14달러였던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 비쌌다.
타워에서 내려와 예정해둔 '언더그라운드 투어'를 하려고 다운타운으로 갔다. 혹시 독자들 가운데 '언더그라운드 투어'는 라는 말에서 약간의 호기심을 자극받는 분이 계신지.... 나도 그랬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책을 보고 이걸 꼭 해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시애틀은 상품 그 자체보다 그것을 포장하는 능력, 즉 마케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그리 실망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리 감탄할만한 볼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더 그라운드 투어를 간단히 말하면 옛날에 있던 다운타운의 그라운드 레벨을 한 단계 높여 그 위에 새로운 길과 상점들을 건설한 점을 활용한 투어다. 지하로 내려가서 옛날에 있던 거리, 건물의 일부를 안내자가 재미있는 말을 섞어가며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옛날 것을 제대로 치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채 뒀다가 '언더그라운드 투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서 파는 이 마케팅 능력, 대단하다.
그다음에 찾은 곳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Pike Place Market) 이곳도 시애틀 관광객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관광안내서마다 침을 튀기며 소개하고 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한국의 재래식 남대문시장과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하긴 미국에는 이런 재래식 시장이 없으니 열린 공간에서 생선, 과일, 꽃 등 온갖 것들을 파는 이런 곳이 신기하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값도 쌌다. 생선값은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 잘 모르겠지만 큰 꽃 한 다발(30~ 40송이 정도)에 5달러, 10달러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쌌다. 이 정도면 호놀룰루에서의 반값도 안된다. 사람은 무진장 많아서 거의 인파에 떠밀려 다녔다. (한국의 남대문 시장보다 더 많다) 그래도 그 시장 안 한 음식점에서 샐러드와 버거로 점심을 먹은 후 쭉 걸어가다가 문제의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스타벅스 1호 점이다.
한국의 관광안내서에는 스타벅스 1호점의 위치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영어로 된 안내서에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시애틀에 갔는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1호점을 구경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샅샅이 살폈는데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더니 파이크 프레이스 마켓을 설렁설렁 거닐다 정말 우연히 바로 그곳을 발견한 것이다.
스타벅스 1호점에는 사람들이 무진장 들끓었다. 놀라운 것은 가게가 아주 조그 많고 사람들이 들끓어서인지 스타벅스 1호점에는 앉을자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예 테이블이 없었다. 물밀듯 들어가 커피니 컵 등을 사는 사람들, 커피를 사는 사람들, 주문하는 사람들, 물건을 고른 후 계산하기 위해 긴 줄을 서있는 사람들, 이렇게 사람, 사람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줄이 길어 그냥 갈까 하다가 마침 커피가 당겨 한잔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물건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컵이 하나 있어 샀다. 여행만 가면 직장 동료를 줘야 한다고 선물 사기에 바쁜 소피가 내가 10달러 주고 컵을 하나 사자 신기한 듯 쳐다본다.
"스타벅스 1호점이잖아"
사실 나도 여기서 특별히 기념품을 살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진짜 이유를 살짝 공개하자면 이렇다. 보통 머그를 잡을 때 엄지가 위로 올라가고 손잡이에는 손가락 세 개 정도밖에 안 들어간다. 머그를 잡을 때마다 손잡이에서 검지를 빼야 할지 새끼를 빼야 할지 고민했다. 세 번째나 네 번째 손가락은 지리적인 이점을 누리고 있으므로 빼기가 곤란하다. 보통은 검지를 빼는 경우가 많지만 형평성을 고려해 새끼손가락을 빼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런데 파이크 플레이스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이 스타벅스 1호점에서 머그 하나를 잡았는데 네 손가락이 쏙 들어가는 것다.
"이것 봐라?"
그래서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다른 컵을 들어봤더니 예의 다른 컵들과 마찬가지로 세 손가락만 들어가는 거다. 다른 컵도, 또 다른 컵도.
"아~ 이건 잘못 만들어진 거구나..."
그래서 그냥 샀다. 이 머그와 나는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머그 손잡이에 네 손가락을 넣기 원하는 독특한 사람과 (다른 사람도 그럴까? 소피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는 세 손가락만 넣어도 전혀 안 불편하다고) 우연히 네 손가락이 들어가도록 잘못(?) 만들어진 스타벅스 1호점의 한 머그.
저녁에 우리가 묵는 B&B에서 식사를 하기로 예약을 해놨기 때문에 좀 서둘러 들어갔다. 원래 저녁식사는 B&B에 포함되지 않지만 주인아줌마가 요리사인 관계로, 옵션으로 원하면 별도의 비용을 내고 신청할 수 있다. 값이 1인당 30달러로 조금 비싼 편이지만 "'프랑스 요리사'가 만드는 저녁을 그 정도에 먹는 건 싼 거다"는 생각에 선뜻 신청을 했다. 정식 프랑스 디너 코스는 아니라, 간단한 음식과 디저트, 와인 한 병이 포함된 저녁이었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줌마와 사는 얘기도 잠시 나누고. 스튜어디스를 했으니 전 세계를 두루 다녔을 이 백인 아줌마,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여기 시애틀 교외를 선택해 이런 예쁘장한 B&B를 하고 있을까? 이 아줌마는 여기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할까? 생각은 점점 더 발전하기 마련이다. 우리도 어디 좋은데 자리 잡고 이런 멋진 B&B 한번 해볼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는 가운데 네쨋날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12년 전에 갔던 그 B&B 이름은 'Auberge de Seattle, A French Country Inn'이다. 혹시나 해서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아직도 있다. 아직도 그 아주머니가 주인인지는 잘 모른다. 가격은 꽤 비싼 것으로 나온다. 시애틀은 도시에 물이 많아서인지 공기가 늘 깨끗한 느낌이다. 일 년 중 반 이상은 날씨가 좋지 않고, 나머지 반 이하는 아주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에 비가 많아서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스타벅스 1호점, 파이크 프레이스에서 사 온 그 머그, 아직도 쓰고 있다. 지금은 커피를 안 마시지만 여전히 그 컵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그러고 보니 프로화일 사진이 바로 그 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