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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믜 Aug 18. 2023

넘쳐나던 슬픔을 한 번에 날려버린 것

워킹맘의 퇴사일기 두 번째. 일상에서 인생을 배우다

얼마 전 퇴사 관련한 글을 썼었는데, 이 참에 이어서 그때의 일을 하나 더 써보려고 한다. 나 스스로 조금 놀라운 순간이었어서 남기고 싶었다.



퇴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퇴사를 생각한 이래로 이미 여러 번 울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설움이 복받쳤다.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잘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맞아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을 쏟고 정들었던 것에 이제는 하나씩 정을 떼어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눈물을 손으로 훔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꺼이꺼이 눈물이 났다. 그런데 어디 가서 혼자 울 수는 없었다. 1분이라도 빨리 집에 가서 아이를 봐야 하니까, 내가 울 수 있는 곳은 퇴근길 밖에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엉엉 울며 집까지 갔다. 집에 들어가서도 울음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마법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빠와 소파에 앉은 채로 “엄마~ 아빠랑~ 그랬는데~” 하며 바로 말을 걸어왔다. 방금까지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이 울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 아이가 가득 채워놓은 온기가 내 울음을 멈춰버렸다. 내 우는 얼굴을 보면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의 말에 빨리 반응하고 싶은 마음에 얼른 손을 씻고 얼굴도 추스르고 아이에게 갔다. 평소 같으면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이를 챙기고 집을 챙기기 위해 약간은 지친 상태로 엄마 모드를 발동했을 테지만, 그날은 우리 집과 내 가족이 나를 달래고 있었다. 방금까지 내 온몸을 지배하던 슬픔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나를 잠식하던 슬픔이 먼지처럼 하찮아져 날아가 버렸다.


집에 아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집에서도 계속 이어서 엉엉 울거나, 슬픈 기운을 잠들 때까지 몰고 다녔을 것 같다. 그런데 아이가 있음으로써 슬픔이 증발해 버렸다. 억지로 꾹꾹 누른 것이 아니라 그냥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한결같이 아끼고, 나를 필요로 하는 소중한 존재가 내 집에 이렇게 있는데 계속 슬퍼해서 뭣하나 싶었다.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나누고 나니 가슴에 난 구멍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과거에는 아이를 가지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지금은 아이가 주는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사회생활은 차갑다. 세상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꿈을 좇는 걸로는 먹고살기가 어렵다. 현실은 바쁘고 정신이 없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책임은 많아지고, 하던 걸 잘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나를 지탱할 가족이 있지 않았다면 냉혹한 사회생활이 내 인생의 전부였을 것 같다. 이래서 계란을 한 판에 담으면 안 된다는 건가 싶을 만큼, 나를 지탱할 장치가 여러 개가 있어야 어느 하나가 무너져도 버텨내는 거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그 힘을 가족에게서, 특히 아이에게서 얻는 것이었다.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 같다.


내가 돈을 많이 모아놓고 자기계발을 열심히 해서 능력이 출중하면 갑자기 하던 일을 못하게 되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용기를 얻는 것, 나 자신이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끼는 것은 양육에서 오는 것 같다. (아이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양육에 따르는 책임감은 무겁게 느껴지지만, 반대로 아이 덕분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된다.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던 그 무렵의 나는 대학원 졸업 후 구직을 시도한 지 이미 몇 달이 된 상태였고, 수많은 거절 이메일을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날 원하지 않고 내 역할이 없다는 기분을 느끼며, 떠밀리듯이 결정한 게 아이를 갖는 거였다. 막상 아이가 태어나자, 매 순간 엄마를 찾는 아이 덕분에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내 이력서가 충분하지 않고, 내 언변이 화려하지 않아도 아이는 나를 좋아해 주었다. 세수도 못하고 옷도 차려입지 않았는데도 나를 보고 웃었다. 취업 기회를 얻어보려 네트워킹 자리를 위해 그렇게나 준비를 해도 안 됐는데 말이다. 그 덕분에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육아를 하는 중에는 성질이 바닥을 칠 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아이는 귀여움을 끼얹는다. 아이가 없으면 웃는 순간이 하루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웃긴 콘텐츠, 맛있는 음식, 게임의 재미를 통해 웃는 건 지속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가 주는 웃음은 사랑이 따라오며, 그 사랑은 웃음 이후 내게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아이가 있기 전에 느꼈던 슬픔은, 일이 너무 바빠서, 슬퍼할 시간이 없어서 잊혔다. 그런데 아이가 주는 힘은 그것과는 달랐다. 내가 느끼는 현실의 힘든 감정을 하찮게 만들어 버린다. 본질적으로 해결을 해주지는 않지만, 어두운 감정을 잘게 부수어 흩트려 버린다. 힘들어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하찮아진다. 아이가 힘듦과 책임감을 덮을 정도의 기쁨을 준다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 도저히 몰랐던 과거가 분명 내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알겠다.


(좌) 머리가 긴 남자아이를 기르며 사회의 편견을 더 마주하게 되었다. (우) 아이가 있지 않았다면 내가 마흔이 다 되서 스케이트보드를 타 볼 생각이나 했을까 싶다.



Image by Tomislav Jakupec from Pixabay


*이 글은 소정의 원고료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인구2.0 #경기도아이원더 #저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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