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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Nov 10. 2023

더 기뻐할 걸 그랬다.

자동차 검사 날짜를 끝내 넘겼다. 이주 전쯤 했어야했다. 소원성취 같은 '구두' 계약을 따 낸 날 이틀 후가 검사 유효기간 마지막 날이었다. 들떴을까, 흥분했었나, 아무튼 새까맣게 잊었다. 사오 일 전에 벌금 부과 안내 편지를 아내가 건네줄 때에서야 비로소 기억이 났다.


오래 공을 들였다. 작년에 상품 제작에 가장 중요한 공정에 성공하고서도 바로 다음 단계 일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 성공도 따지면 거의 5년, 6년 전부터 준비하던 일이었다. 햇수로는 육 년 가까이 해묵은 일이다. 코로나 3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기라서 빼야 하니까 궁리와 시도를 거듭한 시기는 3년 정도로 보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이던 일을 작년 여름에 드디어 성공을 했어도 섣불리 영업에 나설 수 없었다. 안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컸다. 크게 기대하는 일이었고 앞으로 몇 년을 좌우할 일이다. 그런 생각들은 이 일이 단지 안되면 큰일 나는 정도를 넘어 안되면 정말 안 되는 일로 각인됐다. 조심스러웠다. 거래처에 알리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알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좋을까 궁리했다.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런 공정을 해냈다는 문자와 함께 샘플 사진을 보내기로 했다. 업체 담당자는 드디어 해내셨군요라고 짧게 답을 해주었다. 판매 쪽은 거기까지 해놓고 일단 멈춤. 그리고 나는 뒤로 돌아 공급 협력 업체들 다지기에 들어갔다. 이것도 천천히 스미듯 접근했다. 일을 그르치면 내 사업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조바심은 애써 숨긴 채 사소한 일인 듯 질문과 요청을 고 답이 궁금해 죽겠는데도 일부러 한참씩 연락을 끊었다가 지나가듯 이었다. 속은 타들어 가지만 남들이 볼 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척했다.


지난달 26일에 주거래처 담당자와 점심 약속을 했다. 밥을 먹고 업무 미팅을 할 계획이었지만 예정보다 30분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선미팅 후식사가 되었다. 의례적인 안부와 업계 이야기를 짧게 하다가 미팅 약속을 잡기 전에 내가 보낸 업무 제안서 메일을 보셨냐고 물었다. 다이어리를 펼친 채 눌러 짚고 있던 왼손과 볼펜을 쥐고 있는 오른손이 가늘게 떨렸다. 본부장의 대답에 모든 것이, 아니 앞으로 내가 계속 이 사업을 이어갈지 말지가 달렸다.

그렇게 하시죠.

아, 예, 그러면 어느 상품부터 테스트 진행을 할까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호흡이 덜컥거렸다.

43 페이지에 있는 이것과 44 페이지에 있는 것부터 진행하시죠.

얼른 카탈로그 해당 페이지 책 끝을 접고 메모를 했다. 글씨가 날리듯 흔들렸다.


설렁탕을 먹은 둥 마는 둥 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부장과 실무를 맡은 차장 한 명 그리고 나까지 셋은 커피를 마시며 어느 도매업체가 어렵다는 얘기와 자수성가한 모 유통업체 사장 이야기를 했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 기억에 남지도 못할 이야기들. 점심시간이 끝나 갔다. 오늘 미팅 내용을 문서로 남기자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한담을 하는 내내 망설이다 입을 뗐다. 계약서는 좀 이른 감이 있으니 협약서 정도로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상대방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잠깐 침묵. 샘플 제작도 본 상품 제조와 똑같이 자금이 꽤 들어간다는 말을 덧붙이고 본부장님 말이 곧 법이긴 하지만 문서 하나 있으면 우리 쪽 구성원들이 좀 더 안심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그러시죠.

아, 네, 고맙습니다. 곧 정리해서 팔로우업 메일 드리겠습니다.

악수를 하고 둘이 돌아서 회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몇 미터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손가락 뼈마디에서 우둑 소리가 났다.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하늘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담배가 달았다.


신촌 쪽에서 한 가지 일을 더 보고 서울역으로 가서 대구행 KTX를 탔다. 너무 오래 소망하던 일이 이뤄지면 이렇게 감각이 둔해지는 걸까. 현실감을 못 느끼는 건가. 이상하게 차분했다. 기쁘다기보다 걱정이 밀려왔다. 원부자재 수급부터 공급망 설계, 설비 구매, 예상 투입 자금까지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뒷목이 아팠다. 대전쯤 지나고는 깜빡 잠이 들었다가 구미를 지나며 깼다.


사장님, 오늘은 도저히 못 가겠어요. 내일 오후에 가겠습니다. 죄송해요.

그리고 오늘에야 단골 카센터에 자동차 검사 대행을 맡겼다. 벌금이 4만 원 정도 부과된단다. 내 탓이니 할 말은 없다. 뒤쪽 브레이크 라이닝과 고장 난 문 점검을 부탁하고 커피숍에 앉았다.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릴 게다. 서울 출장을 다녀온 후 바빴다. 설비 업체, 임가공 업체를 찾아야 했다. 한 군데만 찾아내도 고구마 줄기 캐듯 추적을 할 수 있는데, 첫 단추 찾기가 늘 어렵다. 두 군데 업체를 인터넷 검색과 지인 소개로 알아냈고 다단계처럼 업체 방문을 연이어했다. 오늘 아침에도 두 군데를 다녀왔고 견적을 요청했다. 기준점은 잡은 것 같다. 한 업체의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비용 절감 아이디어도 줬다. 말처럼 된다면 몹시 고마운 일이 될 게다.


커피가 나왔다. 11월의 삼분의 일이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업체 방문을 할 때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영어 약자, 숫자 몇 개, 단가, 압착, 틀, 850만 원, 9백만 원 같은 단어가 보인다. 정리를 하려다 테이블 저쪽으로 밀쳐 놓고 백팩에 넣고 다니는 소설책을 꺼냈다. 일의 단어들과 떨어지고 싶었다. 단편 소설집 첫 편을 읽는데 내용이 무심히 켜놓은 라디오 소리 같이 붕붕 떠다니기만 한다. 장례식장, 조화, 꽃집, 영정 같은 단어만 겨우 남았다.

책을 덮고 창 밖을 본다. 찬바람이 분다. 커피숍 마당의 오래된 큰 나무들의 이파리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로 누워 흔들린다. 턱을 괴고 한참을 보았다.


좀 더 기뻐할 걸 그랬다. 그날, 서울 출장 가서 담당자로부터 긍정의 답을 들은 날, 짧은 순간 두 주먹을 쥐면서 숨을 깊이 빨아들이며 아주 잠깐 흥분했던 다다. 뭔가 억울하다. 숙원 사업 같은 것인데, 소원 성취나 마찬가진데, 겨우 그러고 말았다는 게 억울했다. 재현하기도 어려운 찰나의 기쁨이었는데, 나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고 많은 염려를 너무 일찍 끌어안았다. 기쁨보다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긴장이 컸다. 지금도 그 상태다. 시간이 흐르고 과정을 잘 해내서 첫 납품을 무사히 끝내는 때가 오면 엄청난 기쁨의 파도를 마음껏 타고 있을까. 글쎄다. 또 그다음 걱정을 쓸어안고 어깨가 굳어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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