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마가 부풀어 있었다. 부었다고 하기도 그렇고 혹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혈액암 환자는 전신(全身) 어디나 탈이 날 수 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겨우 설득해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2017년 7월 1일 아침이었다.
의사는 병상의 커튼을 치고 말없이 내 팔을 살짝 건드리며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뇌로 전이가 됐다는 말, 수술 밖에 방법이 없다는 말, 뇌 1/4을 덜어내야 산다는 말. 귀가 웅웅 거렸다. 포기 각서에 서명을 했다. 그날 10시 50분에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하얀 커튼 안에는 어머니와 나, 둘만 있었다. 울었다.
같은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을 치렀다. 연락을 많이 하지 않았고, 오는 문상객은 적었다. 형제자매들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를 추억했다. 친구 몇 분은 학창 시절, 젊은 시절을 얘기했다. 내 친구들은 삼사십 대 젊은 어머니를 기억했고 손자 셋은 할머니를 그리워했다. 나는, 어머니와 나의 긴 애증의 세월을 생각했다.
장례식장은 편집실 같았다. 찾아오는 이들과 맞이하는 우리는 고인과 얽힌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기억은, 그 추억은 모두 다른 편집본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저/ 창비)'를 쓴 정 지아 작가의 데뷔작은 '빨치산의 딸'이다. 1965년생 작가가 1990년에 펴냈으니 그녀 나이 스물셋에 쓴 작품이다. 정 작가의 작품은 세 권 읽었다. 그녀 삶에는 빨치산, 빨갱이 부모의 그늘이 짙다. 거의 모든 글에 배어 있다. 애증의 대상. 아버지.
그 아버지가 갑자기 죽는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이 자전적 소설의 첫 문장이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문상객들은 아버지에 대한 각자의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찾아온다.
정 작가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기억을 보태고 되짚으며 아버지 인생을 복기한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 아버지 알아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데요?"
흔하디 흔한 삼선 슬리퍼를 시멘트 바닥에 문지르며 아이가 머뭇거렸다.
"..... 담배 친군디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든 넘은 아버지의 담배 친구라니. 기분이 상했는지 아이가 눈만 치켜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어쩌다가....."
눈꼬리는 사나워도 넙죽넙죽 말은 잘 받았다.
"교복 입고 담배 피우다가 할배헌테 들케가꼬 꿀밤을 맞았그마요. 양심 좀 챙기라대요. 최소한 교복은 벗고 피우는 것이 양심이라고...."
"그래서? 담부터는 양심 챙겼어요?"
"아니요. 학교를 때려쳤는디요?"
웃었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생각했다.
빨갱이였으며 빨치산이었던, 그래서 연좌제라는 거대한 바윗돌이 되어 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일가 피붙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아버지란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라고 느꼈다.
다문화 가정의 딸, 담배를 피우는 십 대 소녀를 혼내지 않고 그저 양심껏 교복이라도 벗고 피우라는 농으로 친구 삼는 아버지.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사상 때문일까?
그저 사람 좋고 품 넓은 천성 탓일까?
삼식이 삼촌(송강호 분 / 디즈니 플러스)은 드라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타고난 천성과 살아온 관성.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유는 이 두 가지밖에 없어요. 천성과 관성."
세계사의 압축판이라고 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20세기 초에서 말까지 100년의 시대를 살았던 청년들은 늘 무거운 시대적 질문을 받았고 양극단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독립과 굴종,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남과 북, 투쟁과순종 같은.
많이 배우지 못했을, 신분의 속박에 갇혀있었을, 성에 따른 차별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었을10대의 아버지에게, 아니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을 수많은 청년들에게 평등하게, 공정하게, 다 함께 잘 살자는 구호가 얼마나 피를 끓게 했을까.
아버지의 선한 천성이 좌의 선택을 하게 하지 않았을까. 어린 날에 했던 그 한 번의 선택이 나머지 삶을 결정지었을 테고 그 관성이 평생 그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주인공인 딸은 화장한 아버지의 뼛가루를 여기저기 뿌리러 다닌다.
아버지의 체취가 짙게 밴 장소마다 재를 한 줌씩 흩뿌리며, 며칠간의 장례기간 동안 재편집한 아버지의 인생을,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이 한 권의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이며 딸의 해방일지이다.
7월 1일은 어머니 기일이었다. 제사를 없앤 탓에 식구 누구도 기억 못 하는 것 같다. 나도 잊고 살았으니 뭐라 할 일도 아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오랜만에 어머니 모신 납골당에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내 기억과 추억을 다시 엮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나는 아직도 그 응어리를 품고 사는 건 아닐까.
이제는 어머니를 그저 겁 많고 걱정 많았던 그래서 당신을 지탱해 줄 누군가를 오래 찾아 헤맨 사람으로 다시 구성하고 보듬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