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카를로 로벨리 저
중학교 3학년 수학수업은 쉬는 시간이 언제나 턱없이 부족했다. 선생은 1센티의 여백도 없이 칠판 왼쪽 상단 끝부터 오른쪽 아래 모서리 끝까지 필기로 꽉 채웠고, 분필로 마침표를 딱 하고 찍으면 정확히 수업종이 울렸다. ‘아무도 나가지 마!’ 수업은 늘 5분 이상 이어졌다. 분필을 놓고 손을 터는 모습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차렷! 선생님께 경례!' 를 외치고 전속력으로 달려야 겨우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선생의 별명은 ‘서부적’이었다. 사부작의 사투리. 수학 공식의 원리를 ‘서부적, 꼬리 땡’ 같은 애들 귀에 착착 감기는 쉬운 말로만 설명하는데도, 잠 덜 깬 겨울 아침 마당에서 찬 물 세수를 한 것처럼 명료하게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과목 불문하고 그런 선생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 인생에 다시는 없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나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저 선생은 수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구나’
‘다 이해하면 저 어려운 걸 저리 쉽게 설명을 하는구나’
“한 세기 동안 현대 기술과 20세기 물리학의 기초를 제공하며 눈부신 성과를 거둔 가장 성공적인 이 과학 이론을 다시금 살펴보면, 우리는 놀라움과 혼란과 불신에 가득 차게 됩니다.”
책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도 모르겠어요, 자백.
아래 문장도 같은 말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북풍이 몰아치는 극한의 척박한 섬 헬골란트에서 진리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장막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심연이었습니다. (중략) 어쩌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방법을 설명하기보다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천재라는 리처드 파인만은 한 술 더 뜬다.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몰이해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간다.
마흐부터 나가르주나까지, 이 책이 유독 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답답함에 있다고 본다.
결과는 딱딱 들어맞는데 이유는 명쾌하지 않으니.
동서양의 무성한 철학의 숲을 헤맨 이유는, 저자 또한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답’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으며, 여태 나의 양자역학 독서 뒤끝이 왜 늘 찜찜했는지 알았다.
나는, 자기도 이게 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설명을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책은 어지럽고, 읽어도 읽어도 헤맬 수밖에.
20세기까지, 그러니까 아인슈타인까지의 과학은 자연의 이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과학은 신기하기만 하던 자연의 숨은 원리를 보여주었고, 사람들의 이해를 도왔으며, 실험은 늘 예측과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해와 활용.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양자역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
양자역학의 태두 닐스 보어의 말이다.
닐스 보어를 필두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어젖힌 많은 과학자들은 만년에 힌두, 불교 같은 동양철학에 관심을 보였다.
원자폭탄 제조가 가능하게 한 이론.
수만, 수십만의 생명을 앗아간 폭탄은 만들 수 있었으나,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 이론.
파면 팔수록 커지는 좌절.
그 미지(未知)를 수천 년 전의 현인들은 이미 말로 표현했으니까.
현미경 하나 없이.
다시 로벨리의 말이다.
"양자를 이해하기 위해 저는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 놀라운 이론이 제공하는 이상한 세계상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 기반을 찾으려 했던 것이죠. 아주 좋은 제안과 날카로운 비판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완전히 납득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과학은 현상을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해석의 도구가 돼버렸다.
(코펜하겐 법칙이 아니라 코펜하겐 해석인 이유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 했다고 쫄지 말고, 자책 말기로 하자.
저들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다른 많은 책들과 똑같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또 하나의 도구.
충분하지 않은가?
(나도 모르겠다는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