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책
이십 대 시절,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며 나 혼자 서점과 도서관을 열나게 들락거렸다. 몇 달을 그랬다. 책만 봐도 두근거렸고 설렜다. '대책회의'를 시작하면서도 책방, 서점, 출판, 로컬 비즈니스, 공간 기획, 트렌드, 유통, 마케팅, 브랜딩에 관한 책을 백 권 넘게 읽었다. 꿈의 꿈을 꾸면서 행복했다. 나는 무엇을 시작할 때 먼저 글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과정이 캠핑 전날 마트 장보기처럼 재밌다.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먹고 글 몇 개 쓰고 읽으며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쓰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잘할 거라고 우길 수 있는 영역에 고이 모셔둘 걸, 괜히 집적거려서 못하는 것 리스트만 길어졌다고 후회했다. 쓰지 말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가 맞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포기하지 못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쓰기는 멈췄어도 글쓰기에 관련된 책과 칼럼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다못해 제목과 목차라도 훑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다고 없는 재주가 생기진 않았지만, 죽은 말 채찍질하듯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기예’의 뜻풀이는 이렇다.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닦은 기술이나 재주.’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넘어지고 구르면서 한참 시간을 들여 몸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기예를 익히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초반에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고 자빠지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좋은 글을 판별할 수 있다고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초보 작가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기예의 두 번째 특징은 남이 하는 설명으로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고 몸으로 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깨침과 숙달 사이에 시간이 걸린다는 게 기예의 세 번째 특징이다.
기예를 익히는 사람은 훈련하면서 자신의 스타일과 장점을 발견한다.
…
모든 초심자에게 이토록 공평하게 막막한 분야가 세상에 얼마나 남았단 말인가.
-책 한번 써봅시다 / 장강명 저 / 한겨레출판-
장 작가는 글쓰기를 기예로 정의하면서, 권투, 색소폰, 수영과 같은 육체적 훈련의 영역으로 비유했다. 참으로 적절하다. 브런치 작가가 됐다는 들뜸이 가라앉았을 때, 글쓰기 열정이 차갑게 식어 꽁꽁 얼어버렸을 때,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가 내겐 도끼였다. 장 작가의 책이 글쓰기 욕망에 다시 불을 댕겼다면, 원고지 600매를 쓰는 동안 가뿐 숨을 몰아쉬며 자꾸 주저앉으려는 내 손을 잡아끌어준 사람은 은유 작가였다. 특히 '쓰기의 말들 (은유 저 / 유유)'은 쓰기에 미숙해서 주저하는 내 손을 붙들어 노트북 자판에 올려준 책이다. 조용한 커피숍에 앉아 의식처럼 그녀의 글 한 꼭지, 두 꼭지 읽으면 쓰고 싶은 마음이, 써보겠다는 용기가 생겼고 여섯 달을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조용히 곁을 지켜주었다.
힘을 주는 책이 있다면, 힘이 빠지게 하는 책도 있다. 김 애란 작가의 글이 그렇다. 김 작가의 소설이 자판으로 가야 할 내 손가락을 꺾어버리고, 앉아 있던 척추 기립근을 휘청이게 만든다면, 에세이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저 / 열림원)은 가당찮은 나의 글 욕심을 조용히 주저앉힌다. 좋게 말하면, 분수를 깨치게 하여 부족한 내 글에 다소곳이 안분지족(安分知足) 하게 만든다.
넌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과욕이야,
이제 그만 엔터 키 눌러.
* 제목 '쓰기의 책들'은 은유 작가의 책 제목 '쓰기의 말들'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