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막 시작했을 때, 좋은 장비가 좋은 글을 만들 거라는 미신 같은 믿음이 있었다. 싸고 좋은 중고 노트북을 사려고 친구에게 RAM이랑 메모리, CPU는 뭐가 다른지 물었다. 머스마들은 친절하고 다정하게 알려주면 죽는 줄 안다. 그것도 공부 안 하고 노트북을 사려고 하냐로 시작하는 설명을, 핀잔일까 비아냥일까 헷갈려하며 들었는데, 램에 대한 비유가 머리에 팍 꽂혔다. 램은 책상이란다. 책상이 클수록 올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고 했다. 책도 여러 권 펼쳐 놓고 이것저것 손 가는 대로 읽을 수 있고, 갖가지 문구류를 올려두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바로 쓸 수 있단다. 적절했다. 나 같은 초짜가 바로 알아먹었으니.
RAM은 'Random Access Memory'의 약자로, 컴퓨터가 프로그램 실행 중 필요한 데이터를 임시로 저장하고 빠르게 읽고 쓰는 휘발성 메모리입니다. 컴퓨터의 단기 기억 장치와 같으며, 용량이 클수록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행하거나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유리합니다.
-구글 제미나이 답변-
책방 망한 이야기 책 두 권을 읽고 있다. 임소라 작가의 한숨의 기술을 읽다가 처음 책방을 시작한 이유 꼭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 마음이란 게 있다면 녹는 기분이었다. 마음이란 게 있다면, 이라니. 마음이 있지, 그럼.'
철제 책상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상상을 했다.
마음은 있지. 암만.
회사 내 방에는 커다란 테이블 두 개가 기역자로 놓여 있다. 하나는 업무용이고 하나는 글쓰기용으로 쓰려고 좁은 방에 기어이 욱여넣었다. 글쓰기용은 현관 입구 협탁처럼 쓰고 있다. 백팩, 샘플, 옷가지, 손수건, 손목시계, 이어폰, 여러 권의 책 등으로 어지럽다. 급하게 뭐 하나 올려 두려고 봐도 빼꼼한 공간을 찾기 어렵다.
사람 마음이 책상 같다. 들긴 들었으나 확정되지는 못한 기분, 해야 할 일들을 잔뜩 구겨 넣어 뽈록한 백팩, 유통기간이 다됐지만 아직 버리긴 아깝다고 믿는 관계,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할 어정쩡한 기억, 쫓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꿈 쪼가리 같은 것들로 가득 차서 새로운 무엇도 놓을 수가 없는 책상.
이렇게 생겨먹은 채 오래 살았으니 용량을 늘리긴 어렵겠지?
노트북처럼 램을 확장할 수도 없고.
좀 비우기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