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에서 브런치 작가와 계약하는 출판사 대표가 되다.
"서점에서 만나자."
나의 약속은 언제나 서점이었다. 책을 넘기는 사근함과 잔잔한 클래식 음악. 고요함과 침묵을 비집고 퍼지는 책 냄새.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지만 각자 손에 쥔 책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읽고 이해하는 분주함. 인생의 지혜를 빌려주는 너른 아량. 그 모든 것이 있는 곳. 나는 서점이 좋았다.
매대 위에 가지런히 올라 온 책들은 내게 경이로운 존재였다. 키를 훌쩍 넘는 서재를 천천히 거닐며 손 끝으로 촘촘히 세워져 있는 책 등을 매만졌다. 범접할 수 없는 압도감과 동경이 일렁였다. 나도 언젠가 '출판'이라는 세계에 초대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어 첫 책을 출간했다.
어디든 그렇듯 동경하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감없는 민낯에 환상은 금이갔다. '고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때도 있었고, '에계?'라고 혀 끝을 쯧쯧 찰 때도 있었다. 문학이라는 숲 길을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는 도끼를 들어야 했고, 창작이라는 액자를 걸기 위해서 누군가는 망치로 못을 박아야 했다. 마음을 충만케하던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움은 재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던 나의 서점은 소리 없는 전쟁터로 분했다. 첫 책을 들고 도망가고 싶었던 패잔병은 브런치에서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출판계의 노른자. 강남 교보문고 새로 나온 에세이 코너에 놓여 있는 내 책을 보고 있었지만 뭔가 삼삼했다. 마음이 푸른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이지 않았다. 브런치 작가 승인 메일을 받았을 때가 더 뿌듯했고,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받았을 때가 오히려 드럼 위에 심장을 올려놓은 것처럼 자지러지게 기뻤다. 그건 출판사의 탓도, 책의 탓도 아니었다.
작가는 자신의 텃밭에서 글 농부로서 책을 짓는다.
누군가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드러내 밭을 갈고닦아 좋은 글을 지어내기도 하고, 어떤 가벼운 이는 겉만 슬슬 재다가 여운 없는 글을 선보인다. 나는 손은 느리지만 기획 머리는 팽팽 돌아가는 글 농부에 가까웠다. 눈짓은 사만리인데 발걸음은 한양 문턱이니 손톱 끝만 애달프더라. 내 밭은 안 갈고 남의 밭까지 굳이 기웃기웃 찾아가 넘치는 관심을 부었다. "조금만 갈면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은데." 하면서. 결국 나는 큰 땅을 하나 사기로 마음먹었다. 열과 성을 다해도 황폐하기로 소문난 출판사라는 땅을 사버리고 말았다.
오늘 브런치 작가님과 다섯 번째 출간 계약을 맺었다. '갑'이라고 적혀있지만 언제나 '을'이었던 작가에서 작지만 어엿한 출판사 대표로 분해 도장을 찍었다. 브런치 작가 승인 메일을 받으며 설렜던 작가 지망생은 이제 4년의 시간이 흘러 출판사 대표가 되었다. 갑질 아래서 초라한 현실을 마주하며 울던 초보 작가는 이제 없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미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향해하는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작가가 아닌가.
출판사를 등록하고 작가님들과 계약을 하면서 나는 다시금 서점이 좋아졌다. 서점의 안온함이 좋았다면 지금은 책 속에 옹골지게 담긴 활자의 생기가 좋다. 각고의 시간을 들여 작가님들이 깎아낸 글들의 쨍쨍한 고유함이 좋다. 누군가 용기 있게 들려준 당신의 인생이 고맙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지랑이 같던 말들을 잡아 글이 되는 시작점에 내가 있다니. 그 사실이 쿵하고 마음을 울린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이름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계약을 하는 날은 진이 쪽 빠진다. 계약을 한 브런치 작가님이 '아직 원석인 저희를 보고 보석으로 만들어 주시려는 열정 가득한 두 분께 진심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요'라는 손편지를 선물로 주셨다. 쑥스러웠다. 이미 작가님의 이야기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난 그저 그 빛에 반사판을 댈 뿐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는 기회는 받았으니 잘 부탁드린다는 인삿말은 내가 했어야했다.
횡포와 갑질. 기존의 관행. 순리와 순서보다 먼저인 것은 역시나 이야기다. 시간과 공을 들여도 밭을 엎어야 하는 고단함이 있는 가시밭길이지만 나는 진심이 담긴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그 어려운 진심을 이름뿐인 출판사에게 나눠 주신 작가님들에게 고맙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후끈하게 올라간 온도만큼 나의 시작점도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점이 우리 모두의 시작점이라고 되뇌이며 노트북을 켠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고 그럴 것이다. 걱정과 기대가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온다. 때때로 걱정이 기쁨을 잡아먹는다. 어떤 결과를 마주할 지 모르지만 이야기의 힘에 기대본다. 한결 단단해진 나는 오늘도 일렁이는 마음을 붙잡고 당신의 글을 기다린다.
우리는 누구나 내 인생의 작가니까.
키만소리 (김한솔이)
2년간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를 만들었다.
여행자에서 이제는 작가와 글방 에디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제3회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를 출간했다.
세계 여행하면서 받은 엄마의 메일을 엮어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를 출간했다.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쓰며 활발히 연재 중이다.
인스타그램 @ki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