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의 본질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에 있다
모든 것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다. 숫자는 기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다룬다. 실적 발표도 자동으로 요약되고, 투자자 질문에 챗봇이 먼저 응답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는다. IR의 본질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에 있다는 것을.
AI는 효율적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분석하고, 반복되는 질의에 기계처럼 정확히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설득의 언어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투자자는 수치보다, 그 수치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의 ‘맥락’에 신뢰를 둔다. 기업이 어떤 방향을 택했는지, 그 선택의 이유와 철학을 전하는 일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AI가 실수했을 때 책임을 지는 것도 결국 우리다.
공시와 정보 제공은 법적·윤리적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정보가 잘못 해석되거나 맥락 없이 전달될 경우, 그 신뢰 훼손은 IR팀이 온전히 감당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AI는 도구고, 사람은 신뢰의 주체다.
AI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사람은 관계를 설계한다.
효율은 AI에게 맡기되, 해석과 감정, 책임은 우리가 가진다.
AI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디까지가 기계의 일이고, 어디부터가 사람의 책임인지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 명확한 구분이야말로, IR이 AI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2025년, 나는 문득 생각했다.
“과연 이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인간이 해야 할까?”
AI가 스스로 코드를 짜고, 법률 문서를 해석하고, 심지어 CEO의 발언을 분석해 투자 의사결정을 돕는 세상이다. IR이라는 직무도 이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다. 투자자에게 전달되는 대부분의 자료는 표준화된 데이터이고, 그중 상당수는 이미 AI가 생성하고 있다.
실적 발표 슬라이드는 자동으로 채워지고, KPI 그래프는 API를 통해 실시간 갱신된다. 심지어 IR Q&A 세션의 일부는 LLM 기반 챗봇이 응답한다. 명쾌하고, 거짓 없고, 때로는 인간보다 설득력 있는 문장이 나온다.
그렇다면, IR담당자는 사라지는가?
나는 한 번도 IR을 ‘단순한 실적 전달’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IR이란 결국 “우리 회사는 왜 존재하며, 어디로 향하는가”를 투자자와 함께 설계하는 과정이다.
AI는 이 스토리를 쓸 수 있을까?
2024년 하반기, 회사는 생성형 AI 기반 SaaS 플랫폼 전문그룹으로의 전환을 발표했다. 기술팀은 자신들의 로드맵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투자자 반응은 싸늘했다. 이유는 단 하나. “왜 이 변화가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만의 차별점이 무엇인지 감이 안 온다.”
이때 IR팀은 CEO, CTO와 함께 3개월 간담회 로드쇼를 돌며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우리가 이 길로 가지 않는다면, 3년 뒤 어떤 고객을 놓칠까요?”
“우리가 쌓아온 데이터와 파트너십은 경쟁사보다 무엇이 다른가요?”
이야기는 숫자에서 시작하지만, 선택은 철학에서 나온다.
그 철학은 아직 AI가 쓸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AI 덕을 많이 본다.
공시자료 작성의 초안은 더 빠르고 정확해졌고, 반복되는 기관 투자자의 질문은 사전에 챗봇이 걸러준다. IR 세션 참가자의 성향 분석도 예전에는 일일이 검색하던 수고를 덜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AI는 도구일 뿐, 선택은 여전히 우리 몫이라는 사실이다.
2025년 초, 한 투자자가 AI 챗봇에 “향후 AI규제 리스크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챗봇은 ESG 보고서와 CEO 코멘트를 인용해 정직하게 답했지만, 오히려 그 정직함이 불안감을 키웠다.
결국 IR팀이 직접 콜에 들어가, 규제 대응 전략의 맥락과 정부 관계 협의 흐름까지 설명하며 불신을 풀 수 있었다.
그때 다시 깨달았다.
“AI는 정보를 말하고, 인간은 맥락을 말한다.”
IR은 궁극적으로 신뢰의 아키텍처다.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투자자에게 무엇을 먼저 말할 것인가,
좋은 실적이 났을 때조차 그것이 단기적인 착시인지, 장기 비전의 첫걸음인지를 구분해서 말하는 일이다.
2023년 말, 모빌리티 플랫폼 기업 A사는 기술 고도화 실패로 실적 쇼크를 겪었다.
하지만 IR담당자가 먼저 나서서 “단기 수익 포기는 있었지만, 장기 고객 생애가치 상승 곡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6개월 후 재무성과로 이를 증명했다. 이 스토리는 언론 매체에서도 ‘전환을 설계한 IR팀’이라는 제목으로 조명되었다.
AI는 주가 하락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신뢰로 전환시키는 언어는 아직 만들지 못한다.
나는 IR담당자로서 이제 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AI와 함께 전략을 짜고, 인간다운 언어로 신뢰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내 책상에는 KPI 대시보드와 AI 답변 요약 툴이 함께 있다.
그러나 내 노트에는 매주 ‘CEO가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와 ‘투자자들이 불안해하는 포인트’가 손글씨로 적혀 있다.
AI는 데이터를 제공하고, 나는 그 데이터를 사람의 마음에 닿도록 다시 말한다.
AI는 이미 수많은 언어를 배웠지만, 나는 우리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말할 줄 아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
AI는 IR을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IR의 본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게 만들 것인가’에 있다.
그 신뢰의 전략은, 여전히 인간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