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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월 Mar 11. 2017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존재와 이미지

아래 첫번째 그림은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이란 작품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분명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네요. 이 그림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우리의 관습화된 고정관념에 충돌과 파문을 일으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존재로서 인식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과의 존재로서의 가치는 먹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그림 속 사과가 이미지로만 존재한다면 ‘그림의 떡‘일 뿐 나에게는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겠지요.


   이미지로서 내가 서있을 수 공간이 sns라는 세상입니다. 손바닥만한 나의 소우주이죠~ 여기에서 나는 실제가 아닌 이미지로 살아갈 수 있고, 타인에게 내가 만든 하나의 허상으로 나를 인식시킬 수 있습니다. 나의 다양한 아바타를 탄생시킬 수 있는 환상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sns상의 이미지와 존재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 “실제 보니 안 그렇더라. 이미지와 딴판이던데...” 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하곤 합니다. 단지 사진과 글로만 대상을 접했기 때문에 실제 만남을 해보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첫 만남은 설레기도하고 두렵기도 한 듯ㅎㅎ)


   이런 허구와 허상의 공간인 sns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머물고 있을까요? 왜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도 이 작은 소우주에 몰입되어 있을까요?  

   이유를 나름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근원적인 감정을 어느 정도는 해결해주기도 하고, 내 얘기에 호응해주고 대답을 해주며 반응을 보이는 누군가가 있어 마음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같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내가 가진 아둔한 생각도 다양한 관점을 접하면서 조절해보기도 합니다. 때때로 원하는 취향의 취미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더 없이 큰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반면, sns공간은 언어로만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나의 의도와 달리 사실이 왜곡되거나 상대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오해를 하기도 하고 받기도 했지만 두 경우 다 내게도 상대에게도 작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일이었죠. 알고 보면 별 일, 별 얘기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보다 더 서운하고 더 화가 나고 속상합니다.


   그러면 sns에서 나와 대상이 잘 지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해봅니다. 혹 오해가 생길 소지가 있으면 즉각적인 반응보다 그가 나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음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 중요할 듯해요. 모든 인간의 의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사랑받고자하는 내면의 욕구를 때로는 자신의 성향과 성격 때문에 다소 의도와 다르게 표출될 수 있음을 우리는 받아드리고 이해해 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순수한 그의 의도가 드러나도록 기다려 주면 더욱 좋을 듯...


   sns상에서의 우리의 관계도 허구와 허상이 아님을 저는 느끼고 싶습니다. 늘 올라오는 음악과 시와 다양한 삶의 일상들에 길들여지며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고 있으니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 사라짐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일들에는 합당한 이유와 논리가 있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잊혀지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잊혀짐을 당하는 건 슬픔이고 상처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꽃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존재로서 그에게, 그는 나에게 흔들리지만 결코 꺽임 없는 꽃이고 싶습니다.


  긴 글입니다. 그냥 소소한 얘기로 시작했지만 밤이면 말 많아지는 제 특성상 길어지고 말았네요.~^^


늘 마음 평안 깃들길 소망합니다.~

       

                                                  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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