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티크 인터뷰
우리는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결정은 어떠한 상황에 둘러싸여 있는지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기도 하고, 집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카페에 가면 손쉽게 해결될 때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이처럼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을 때 성공을 가르는 건 때때로 정확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어떤 상황 속에 적절히 자신을 밀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았는데도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 않다면 욕망이나 의지를 의심하지 말고 환경을 만들어보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스타트업에서 사업관리를 담당하는 김범수 님과 ‘루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루틴의 만들었을 때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삼성그룹에서 경영관리 및 해외사업개발 업무를 3년 정도 했는데 대기업이라 연봉도 높고 복지도 좋고 회사의 네임벨류가 좋으니 든든했어요. 그런데 명함에서 회사 이름, 부서 이름을 빼고 내 이름 석 자만 남았을 때 과연 현재 나의 연봉과 나의 역량이 비례하는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어요.그리고 제 앞에 앉아계신 과/차/부장님이 저의 미래라고 생각했을 때,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더라고요. 마침 회사의 경영 환경이 급격하게 어려워지면서 희망퇴직을 받았어요. 마땅한 대안은 없었지만 일단 여기는 아니라는 확신과 다시 이겨낼 수 있다는 제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퇴사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렸고요(웃음). 딱 한 달 정도 놀고 나니 슬슬 뭔가 해야겠다 싶었어요. 다시 대기업에 들어갈까 아니면 공기업을 준비할까 고민도 했지만, 조직에 기대지 않고 언젠간 홀로서기를 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열정 있고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비즈니스를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였죠.
그래서 3개월 동안 스타트업 대표님들 강연을 다 쫓아다니고, 네트워킹 파티도 가고 콜드 콜 하면서 다양한 분들을 만났어요. 그러다 15명 정도 되는 초기 핀테크 스타트업 어니스트펀드에서 저의 열정을 좋게 봐주셨고 2016년 4월부터 마케터 직무로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연봉은 직전 회사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창업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스타트업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서 바로 좋다고 했어요.
스타트업 라이프는 예측 불가능의 연속이었어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국내에 없던 사업을 만들기 때문에 무엇하나 예측할 수 없고, 참고할 벤치마크도 마땅치 않아서 일상 자체가 위기이고 혼란이었던 것 같아요.대기업은 분업화 및 체계화가 상대적으로 잘 잡혀있다 보니까 주니어 때는 선배들이 시키는 일만 잘해도 칭찬을 받아요. 사실 그것도 완벽하게 해내기 쉬운 일은 아니죠. 스타트업은 조직이 살아남기 바쁘기 때문에 구성원 하나하나를 챙겨줄 여유가 없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누가 업무를 시간 내서 가르쳐주지 않고 특별히 일을 시키지 않을 때도 많았죠.업무적인 갈급함이 있다면 "시간과 돈을 줄게 배워와서 해."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조직적인 시스템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고 생존을 하기 위해 모든 리소스가 투여되기 때문에 불안정한 요소들이 많기도 해요.그래도 불평하지 말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함께 만들어가야 가야죠. 그래서 learning curve가 빠르고 learning by doing, get shit done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응을 잘하고 살아남는 것 같아요.본인의 그릇만큼 배우면서 업무를 가져가는 것이고, 성과와 보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대기업에서는 돈을 주는 대로 받았는데, 여기서는 대표님과 제대로 된 연봉 협상도 해봤어요.
내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된 시간이었어요.다행히 회사가 2년 반 만에 15명에서 120명까지 성장했어요. 2년 반 동안 집중했던 퍼포먼스 마케팅보다는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고 빌드업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더 큰 IT 플랫폼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배달의민족을 서비스하는 우아한형제들로 이직을 했어요.
‘B마트’라는 퀵 커머스 장보기 서비스를 처음부터 빌드업했고, 서비스의 사업 성과를 책임지고 모든 안살림을 챙기는 사업관리 업무를 담당했어요. 단순하게 말하면 사업이 잘 되게 하기 위한 모든 일을 했다고 보시면 돼요. 마치 관제탑이나 특공대와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사업성과를 책임진다는 것은 1) KPI 수립 및 매출/손익 목표 관리, 2) P&L projection, 사업 타당성 검토 등 비즈니스 의사결정 지원, 3) 서비스가 더 성장하기 위한 신규 사업 기회 발굴 및 기획 업무 이 3가지 업무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고요.안살림을 챙긴다는 것은 1) 운영 단에서 현재 벌어지는 이슈에 대해 의사결정 및 서포트, 2) 데이터 분석을 통한 각종 이슈 파악 및 실적 개선 인사이트 도출, 3) 모든 유관부서의 thinking & discussion partner의 역할 이렇게 나눌 수 있어요.
사실 범위가 따로 없이 내 거다 생각되면 다 하는 거예요. 유관 부서 사이에 붕 뜨는 업무가 생기면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교통정리도 하고, 숫자가 안 맞다거나 지표 개선이 안 되어도 투입이 되고요. 돌발 이슈들 생기면 가서 해결하고 그랬죠.딸기가 썩거나, 배송 가던 캔이 터지거나, 건물에 전기가 나가서 아이스크림이 다 녹은 적도 있었는데 그런 문제도 직접 가서 뚫어줘야 해요. 항상 의사결정권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니 강한 오너쉽과 책임감이 수반되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사업이 성장했을 때 보람이 큰 일이에요.
맞아요. 사업을 추진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 십 가지 급한 업무들이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걸 정신없이 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한주가 훅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많았어요. 소 잃고 급하게 외양간을 고치는 일이 반복되니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주요 지표들과 이슈들에 대한 논의를 매달, 매주 살펴보는 루틴을 만들었어요. 루틴이 있으면 급한 업무 때문에 빼먹었던 중요한 지표를 놓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마치 우리가 삶에서 운동, 책 읽기, 영양제 잘 챙겨 먹기 등과 같은 좋은 습관이 있으면 삶이 풍족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생각해요.
사업이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개선하는 것이 루틴의 목표예요. 1) 사업 지표와 사업 이슈를 챙기는 루틴, 2) 운영 지표와 운영 이슈를 챙기는 루틴, 3) 사업과 운영 지표가 결국엔 매출 및 손익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챙기는 루틴, 4) 유관부서와 현안 및 방향성에 대한 align을 하는 미팅 이런 것들이 주기적으로 세팅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팀 내부적으로 필요한 것들도 있는데 1) 사업 전후방적인 상황에 대한 맥락 공유, 2) 팀원들이 서로 무슨 업무를 하는지 내용 공유, 3) 업무 인사이트 및 분석 자료 공유, 4) 서로의 상태와 상황을 체크하며 긴장을 푸는 잡담 타임 같은 것들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요.
당연하겠지만 당장 물에 빠져서 허우적 대고 있거나, 집에 불이 났는데 루틴 챙기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어떤 서비스를 하는지, 조직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어떤 부서 일지에 따라 어느 정도 루틴한 회의를 가져갈 것인가는 모두 다를 것 같아요.회사가 작을 때부터 루틴이 잡히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heavy하게 시작하지 않고 light하게 주간회의 같은 컨셉으로 하나씩 시작하면서 점점 확대해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량화해본 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슈의 70% 정도는 루틴한 회의로 해결하고, 30%는 별도로 논의하고 해결하는 업무 프로세스가 세팅이 되면 좋다고 생각해요.
루틴을 유지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많이 들거든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입학과 졸업을 시켜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주 보던 것을 매달, 분기별로 주기를 조절하거나 더 이상 안 봐도 되겠다 싶은 것들은 빼주는 거죠.그렇지 않으면 덕지덕지 붙으면서 양이 많아지기만 하더라고요. 또한 루틴을 보다 보면 시야가 그 안에만 갇힐 수도 있어서 이 부분도 같이 신경 쓰면 더 좋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독서모임과 운동의 루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너무 좋죠. 그게 쉽지 않은 게 문제겠죠. 그래서 트레바리가 됐든 제가 조직을 하든 독서 모임을 일부러 가입해놔요.그러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책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니 고민도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저의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고 좋은 분들을 아주 많이 알게 되었어요.테니스, 등산, 러닝을 즐겨하고 있는데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니스는 친한 친구들과 정기적인 운동 모임을 만들어서 참석하고 있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는 등산이나 러닝을 제안하면서 운동하고 밥 먹자고 하고 있습니다. 운동도 하며 건강도 챙기고 친구들도 만나고 참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희 팀은 사업 그 자체가 잘되기 위한 모든 일을 했어요. 그래서 힘든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 팀을 찾고 우리가 함께 노력해서 답을 찾았을 때, 또 그것이 유의미한 성과까지 나올 때면 감회가 남다르죠.우리가 챙겨드리지 않아도 각자 function에서 업무가 잘 돌아가고 더불어 서비스도 잘 성장할 때가 오는데 그때 보람이 더욱 커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