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독서 일기 둘. 너 내 동료가 돼라!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 를 읽고

by 구리움 Mar 31. 2025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가 내게 물어오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워진다. 만화책을 좋아해서 정말 많이도 읽었다. 이 많은 것 중에 하나를 고르라니! 너무나 잔인하다. 그렇다고 베스트 5를 고르라는 것도 싫다. 어떻게 순위를 매겨! 전부 너무나 좋아하는 만화책이라 하나만 고르기도 힘들고 순위도 따로 없다.


‘중급닌자’ 편을 생각하면 <나루토>가 제일 흥미진진 하고, ‘하늘섬’ 에피소드에서 ‘선조의 이름은 노랜드인가?’라는 장면을 떠올리면 <원피스>가 가장 감동적이다. 최애 중 하나인 <유유백서>도 빠질 수 없지. 나는 쿠와바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해서 헌신하고 그걸 맘껏 티 내며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교훈을 준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인생을 배웠고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히스토리에>와 중국 삼국시대로 불시착한 고등학생의 무용담 <용랑전>으로 역사와 정치를 알았다. 


최애캐가 누구야?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포프'는 무조건 들어간다. <타이의 대모험>에서 타이는 혈통빨이지. 진짜 주인공은 바로 포프다. 각성 후 간지가 넘쳐버리신 포프사마.


생각해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을 읽었다. 똑같은 학습 만화를 수십 번 보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만화책을 읽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만화방도 있었고 도서 대여점도 많았던 덕분에 여러 만화책이 항상 곁에 있었다. 


이제는 꽤나 나이를 먹은 지금도 만화책을 곧 잘 본다. 아직까지 <원피스>를 읽는 사람이 주변에는 나밖에 없다. 요즘은 만화책보다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 시대가 됐다. 제법 인기가 있는 만화라면 당연히 애니메이션화 된다. 좋아하는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알던 모습과 다른 버전으로 한 번 더 즐길 수 있으니까.(하지만 실사화는 반댈세…) <귀멸의 칼날>처럼 너무나 뛰어난 작화와 효과를 겸비해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재탄생해버리면 너무 감사하다(8월 '무한성 편' 개봉 확정!).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해 인기를 끈 작품 <장송의 프리렌>도 만화책보다 애니메이션이 더 재밌다. 아. <던전밥>도!(아. 던전메시!)


그렇지만 난 여전히 애니메이션보다 만화책이 취향이다. 사각 프레임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뛰어노는 만화책의 그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시선이 움직이는 틈 중간에서 주인공이 움직인다. 만화책 종이 위 시선이 움직이기는 차례대로 연결되는 장면의 흐름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프레임 사이 여백과 머릿속 상상이 더해져, 만화는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더 훌륭하게 등장인물의 화려한 움직임을 가능케 만든다. 생략된 장면을 상상하는 만화책의 매력. 난 그게 좋다. 


이렇게 만화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펀치>라는 책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만화를 만드는 사람들. 만화가와 합을 이루는 그들. 만화편집자가 쓴 에세이라니! 작가가 만화편집자라는 그 자체로 이 책이 대단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나처럼 만화책을 좋아해서 만화편집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화책 한 권을 탄생시킬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펀치>를 읽어도 참 좋겠다. 게다가 만화편집자 이자 책의 작가인 김해인 님은 글을 맛깔스럽게 쓴다. 사람 자체가 재밌어서 글도 재밌는 걸까, 아니면 글을 재밌게 써서 사람 자체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걸까. 아무래도 둘 다 인 것 같아 읽는 내내 즐거웠다.      


<펀치> 첫 추천글은 '난다' 작가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뭔가를 너무 좋아해서 이상해져버린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문장이 좋다. 이상해질만큼 뭔가를 좋아하는 순수함이 나는 좋다.


<펀치>를 읽으며 지배적으로 느꼈던 두 가지 감정은 ‘감사’와 ‘부러움’이었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지금껏 여러 좋은 만화를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고 자기 일에 이렇게 욕심과 사랑을 한껏 가질 수 있음에 또 부러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며 감사하고는 있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과는 차원이 다르더라. 


그래서인지 <펀치>를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나 역시 내가 하는 일에 적잖은 애정을 쏟고는 있다. 김해인 작가처럼 온전히 빠져들어 일과 삶을 함께 끌어안을 정도는 아니지만. 때로는 습관처럼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솔직하지 못할 때도 꽤나 많았으니까. 좋아한다고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친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나 자신을 탓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일을 향한 나의 자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는 의미다.      


책을 넘겨보다 무심코 멈춘 페이지에 등장한 엄청난 제목.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뭐야 이 책. 작가가 자기 책에 이런 제목을 넣을 수 있다니. 뭐야 이거 무서워.


김해인 작가가 하는 ‘편집자’라는 일은 겉보기엔 보조적인 역할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누구보다 주도적이다. 물론 만화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만화가다.(만화가는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로 나뉘기도 하지만 여기선 통칭한다.) 편집자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지는 만화책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편집자의 존재가 덜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만화책이 저절로 발이 달려 짠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서점에 가면 볼 수 있는 수많은 만화책 하나하나에 편집자의 애정과 관심이 담긴다. 그 책 모두가 세상 밖으로 나와 독자를 만나도록 돕는 일. 그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엔 늘 편집자의 손길이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는 아니다.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을 그저 하는 것뿐. 그들이 없었다면 많은 만화책과 우리를 키운 추억 가득한 명장면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누군가 지금까지 읽은 만화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명장면을 꼽으라면 <원피스>에서 대전사 카르가라의 후손 와이퍼가 한 '선조의 이름은 노랜드인가' 이거랑 <슬램덩크> 정대만 '이젠 내겐 링밖에 보이지 않아'를 꼽는다.)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해야만 했던 무수한 결정과 보이지 않는 조율, 배려의 흔적이 바로 그들의 몫이다. 어떤 만화가 독자의 사랑을 받을까? 표지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작가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정답이 없는 고민이라 매번 어려울 거라 예상된다. 그런 치열하고 조용한 고민 덕분에 최고의 장면을 만난다. 만화가의 능력을 더 끌어 올려주고 독자와 연결고리가 더욱 탄탄하게 연결되도록 돕는, 조연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편집자의 일과 책임. 이름 없는 손길이기에 오히려 더 깊이 남는다.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이 참 중요한 것처럼 책의 첫인상인 표지도 너무 중요하다. 모든 편집자의 공통된 숙제, 표지 디자인. 정답이 없어 어렵지만 그래서 또 재밌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인생에서 ‘편집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장면을 골라내고, 흐트러진 흐름을 다듬으며, 삶의 페이지를 하나씩 넘긴다. 때로는 내가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많은 순간 타인의 이야기가 더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주기도 한다. 말 한마디를 고르고, 행동 하나를 조율하며 누군가의 하루에 영향을 주는 일. 결국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편집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김해인 작가의 책 이름처럼 가끔은 인생에 펀치를 던지고 또 맞으면서도. 그렇게 삶을 더 나은 한 권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완벽하진 않아도 누군가의 장면 속에 따뜻하게 남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편집 버튼을 누른다. 


다들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거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간에, 무슨 결과를 가져오든 간에. 


독서를 마치고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다시 묻는다면, 이제 좋아하는 만화책 하나쯤은 자신 있게 골라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바로 나의 인생 만화에 또 하나의 장면을 추가해 준 책, <펀치> 덕분이다.(실제로 이 책을 다 읽으면 자연스레 책에 나온 만화책 한 권 정도는 사게 될 거다. 나는 <룩 백>을 샀다.) 이번 리뷰에서는 괄호로 부연 설명을 이래저래 많이 썼다. 그러고 싶었다. 오타쿠는 원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법이니까.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 김해인 에세이 / 스위밍꿀 /328페이지 / 16,800원


작가의 이전글 독서 일기 하나. 죄테크가 된 내 재테크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