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는 아름답지 않다: 자본과 자원, 그리고 의지의 현실
세상은 종종 '아름다운 스토리'로 포장된다. 영화, 드라마, 보도자료, 심지어 기업의 사과문까지도. 복합적인 사실관계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관점을 달리해 전달하면 같은 사실관계도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써니'는 70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7공주 써니의 멤버였던 주인공 나미가 어른이 되어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서며 청춘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아름답고 애잔한 청춘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학교 폭력의 중심에 있던 일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같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종종 위기관리 과정과 결과 또한 "아름답게 수습됐다", "감동적인 회복 스토리다"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실제 위기관리의 현장은 개인 간 혹은 각 그룹 간 정치력이 냉철하게 작동하는, 매우 현실적이며 계산적인 조직과 자기 보호 본능, 이기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 2화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재벌 건설사 대표 하도영이 학교 폭력 가해자인 아내 박연진에게 던지는 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어." 그저 듣기만 해도 불쾌한, 이른바 '재수 없는' 대사다. 특정 상류층의 물질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적 의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편한 대사는 현실적인 위기관리 현장의 일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위기관리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이 놀라울 만큼 사실적이다. 실무 현장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위기는 오히려 '쉬운 위기'에 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안이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던 위기 이슈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된 경우, 그 이면에는 대부분 돈이 위기 해결의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반대로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해결이 지지부진한 경우, 이면에는 돈이 위기 해결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사안이라 해도 물질적 자본과 인적 자원의 뒷받침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냉정하지만, 위기관리의 본질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의 수학에 가깝다.
실제 위기관리 현장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영웅담 같은 스토리는 거의 없고, 드라마틱한 순간도 없다. 그저 아주 냉혹한 현실만이 존재한다. 밤샘 회의, 끝없는 시뮬레이션, 이해관계자와의 힘겨운 협상, 법률 검토, 재무적 영향 분석, 언론 모니터링, 내부 커뮤니케이션 조율 등 이 모든 과정은 치열하고 고단하며 때로는 무력감을 안긴다.
위기관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는 관리(management)의 개념이다. 기업 구성원과 위기관리 담당자들이 좀 더 선한, 올바른, 안전한 결정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고 올바른 일이라도 그것을 결정해야 하는 의사결정권자의 의지가 없다면 실행되지 않거나 다른 방향으로 실행된다.
이렇듯 많은 위기관리 실패는 원론적으로 들리겠지만 '의지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위기관리를 위한 올바른 의지가 현실적 이해득실과 조직, 그리고 본인의 안위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 위기관리를 위해 만든 시스템과 제도가 '올바른 위기관리 의지'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오히려 '위기 유발 의지'가 이것을 뛰어넘는다. 이는 곧 위기관리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지고 우리가 목격하는 위기관리 실패로 귀결된다.
바로 여기에 현실적인 자본과 자원의 역할이 존재한다. 위기관리에 충분한 예산이 배정되지 않으면 전문 인력을 확보할 수 없고,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으며, 정기적인 훈련을 실시할 수 없다. 위기 발생 시 신속한 보상이나 복구 조치를 위한 재원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과 매뉴얼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결국 위기관리의 성공 여부는 조직이 얼마나 많은 자본과 자원을 위기관리에 투자하느냐와 직결된다.
많은 사람들은 위기관리가 도덕적이고 상식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선택과 행동이 반복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조직의 이해관계, 당장의 재무적 압박, 부서 간 갈등, 의사결정권자의 회피 성향, 시장의 압력 등 수많은 변수가 얽혀 있다. 현실적 위기관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 복잡한 현실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책으로 위기관리를 백날 배운다고 해도 위기관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매번 아름답게 포장되고 원론적으로 당연한 말들만 난무하는 위기관리 결과만 반복되는 이유는, 그 뒤에 있는 냉혹한 현실을 보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보상으로 빠르게 해결된 사건들, 명분 때문에 몇 년씩 끌린 분쟁들,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위기관리 시스템들, 그리고 평소 적절한 예산 투입과 철저한 준비로 위기를 조기에 차단한 조직들, 매년 이런 여러 사례를 본다.
위기관리는 절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위기관리 성공 사례 뒤에는 수백 번의 실패와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존재한다. 그것은 치열한 준비와 냉정한 판단, 충분한 자원, 그리고 조직 구성원 모두의 일관성 있는 협조와 노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위기는 어떤 기업과 조직에도 발생할 수 있으며, 발생했던 위기 또한 언젠가 다시 찾아온다. 이때 기업과 조직, 그리고 구성원을 지키는 시스템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제도나 문서만으로는 부족하다. 끝없는 훈련, 반복된 준비, 그리고 사람들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적절한 자본과 자원이다. 이것이 위기관리의 연료다. 불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아름다운 포장지를 걷어낸 위기관리의 진짜 모습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위기관리의 시작이다.
새해를 맞아 많은 기업과 조직이 위기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각오를 다질 것이다. 하지만 계획과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위기관리에 필요한 실질적 자원을 확보하고, 구성원들에게 지속적인 훈련 기회를 제공하며, 무엇보다 위기관리를 조직 문화로 내재화하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실질적 준비를 해나가는 기업만이 다가올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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