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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Mar 01. 2019

물건에 관하여 - 8

냄비

나는 많은 그릇을 갖고 있지만, 그릇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쩌다보니 식당 자영업자로 살게 된 시간들이 있었고, 식당 하는 사람에게는 주방에서 조리용으로 쓰는 그릇과 손님 테이블에 내놓을 그릇이 종류별로 필요하다.


양식당을 운영했기 때문에 그릇들이 예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그렇다. 그 일을 정리하면서 나는 더러는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많이 필요하다는 이에게는 싸게 팔기도 했다. 그래도 앞으로 이고 지고 살아야 할 그릇들이 제법 많다. 그 중에 무쇠냄비가 하나 있다. 색상별로 세 개를 갖고 있었는데, 두 개는 선물이 되어 내 품을 떠났다. 나는 그 무쇠냄비에 스튜 같은 걸 뭉근하게 끓여 먹는다. 한식으로는 김치찌개 같은 걸 할 때 이용한다.


식당을 운영했음에도 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요리사들의 일에 아주 큰 관심이 없었으므로 수년간의 식당 자영업자 생활을 거치고도 내 가족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나 간신히 해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무쇠냄비와 맛있는 음식의 상관관계를 그럴 듯하게 설명할 재주가 없기 때문인데, 경험적으로 무쇠냄비에서는 무엇이든 오래 끓이면 맛있어지는 것 같다는 류의 애매모호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든 오래 끓이는 데는 자신이 있다. 음식을 할 때 손이 빠른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급한 사람도 아니어서 그런지, 시간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음식을 할 때면 마음이 편하다. 무쇠냄비 안에서 음식이 보글보글 끓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나는 천천히 나이가 들어가는 평온함 같은 걸 느낀다.
나는 그와 함께 먹는 김치찌개를 사랑한다. 설령 그것을 집에서 만들어먹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솜씨 좋은 식당을 찾아 맛있게 만들어진 음식을 사먹는 일에도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는 내가 솜씨 좋은 집 밥을 근사하게 차려내지 못해도 타박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늘 주입시켜왔다. 맛있는 밥은 사먹는 거야.


‘광화문집’ 식당의 김치찌개는 우리 두 사람의 소울푸드다. 이십 년 전쯤에 처음 먹었는데, 그 사이에 맛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광화문집 김치찌개는 최고다. 인사동 ‘부산식당’에서 파는 생태탕도 너무 좋아한다. 생태탕 맛도 일품이지만, 그곳의 밥! 미리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떠놓고 온장고에서 보온해둔 밥이 아니라, 하루에 몇 번이고 새로 짓는 밥. 그 밥이 다 지어져야 테이블에 생태탕 냄비가 올라오고 화구에 불을 붙인다. 그렇게 찌개든 탕이든 익기를 기다리며, 혹은 밥이 다 지어지기를 기다리며, 콩나물이나 계란말이 혹은 무생채 나물 같은 반찬을 집어먹는 시간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우리는 마주앉아 먹는 동안의 온도를 사랑한다. 음식이 점점 뜨거워지는 시간. 냄비 안의 것들이 제 형체를 허물어뜨리며 다른 것들과 천천히 섞여 드디어 질펀하게 끓어오르는 시간. 그렇게 달구어지는 온도를 기꺼이 기다리고 마침내 아껴두었던 숟가락을 든다. 자, 먹자~.  



집에서는 무쇠냄비에 음식을 만들 때 그 온도를 가장 뜨겁게 느낀다. 천천히 오래 끓는다. 맛있어진다. 그래서 좋은 날 좋은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 때 나는 거기에 찌개를 끓이거나 스튜를 끓이거나 하는데, 노모는 내가 그걸 꺼내들면 질색을 한다. 자신이 들고 움직이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이다.


“얘, 그건 냄비 뚜껑도 무거워. 들다가 떨어뜨리면 발가락이 안 남아날 것 같아.”


맞는 얘기다. 노약자의 발가락은 언제나 위험한 법이고, 이 정도 무쇠냄비의 뚜껑이 떨어지면 멀쩡한 성인의 발가락이라고 해도 자칫 큰 일 날 수 있다.


“걱정 말아요. 이걸로는 항상 내가 요리하고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엄마는 여기에 담긴 찌개나 맛있게 들어요.”


그런데 나는 얼마 전부터 그 냄비를 사용할 때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게 되었다. 그동안에는 몰랐는데, 그 무게감이 나의 손목으로 직접 전해지는 것을 요즘 부쩍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구슬펐다. 나에게는 아직 무거운 그릇들이 많이 있다. 무쇠냄비만큼은 아니지만, 접시들도 가볍지는 않다. 나는 그것들을 손님 테이블로 하루에 수도 없이 나르고 또 치워왔다. 손님들이 다 먹은 접시들을 요령껏 하나씩 포개면 5~6인이 식사한 그릇들 정도는 한 번에 나를 수 있었다. 힘과 요령의 조합. 나는 그릇을 드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무쇠냄비를 들었다고 손목이 시큰해지는 시간이 찾아오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거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어느새, 그렇게 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는 깨끗이 설거지해둔 그 무쇠냄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너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너는 그 어떤 온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련된 무쇠인데, 나는 너의 그 물질성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우리가 사랑하는 찌개 끓는 시간을 다시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사실 앞에 쓴 문장들을 시제를 몽땅 새로 고쳐 써야 한다.


나는 그와 함께 먹는 김치찌개를 사랑한다. 이 문장은, 나는 그와 함께 먹는 김치찌개를 사랑했다, 로. 우리는 함께 마주앉아 먹는 동안의 온도를 사랑한다. 이 문장은, 우리는 함께 마주앉아 먹는 동안의 온도를 사랑했다, 로. 그와 나는 그대로이지만, 우리의 생활이 이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저녁은 매일 찾아오는 것인데도 나는 과거형으로 말해야 하는 현재를 살고 있다. 지난 수년간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둘 다 자영업에 뛰어든 이래 식사는 허기를 메우기 위해서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찌개가 끓는 동안, 밥을 짓는 동안, 바로 그렇게 하는 무엇을 하는 ‘동안’을 기다릴 수가 없다. 후루룩 먹을 만한 것들을 찾고, 배달이 가능한 것을 찾고, 음식 냄새를 많이 피우지 않을 것들을 찾는다. 그래서 우리는 배가 고프면 이제 조금 서글프다.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을 한 번의 끼니에 몰아 점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저녁이라도 하기에도 애매한, 여러모로 애매한 식사를 해치운다. 우리의 식사가 이 모양이므로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는 매우 어려운 무엇이 되고 말았다. 식사가 애매해진 탓에, 식구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채로 몇 해를 버티고 있다. 나는 그런 앙상한 식사, 먹어도 허기진 식사의 삶이 다만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서글프다.


누구에게나 노동은 고되다. 그리하여 공평하게 지쳐버린 우리의 육신을 침대에 뉘일 때면 하루 종일 참았던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 한숨 끝에 두려움도 매달려 있다. 내일과 모레, 모레의 내일과 모레의 모레 같은 날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신경질이 날 때도 있다. 그래서 그에게 말한다. 빨리 늙었으면 좋겠어. 나는 빨리 은퇴라는 걸 하고 싶어. 그러면 그가 답한다. 나는 이 노동을 견디고 오래 일을 하고 싶어.


그는 나보다 열 곱절 이상의 노동을 한다. 그는 빵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그는 마당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휴일에는 잔디를 깎거나 화분갈이를 하거나 낙엽을 쓸어야 하고, 그는 나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설거지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읽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펼쳐 들고 침대에 든다. 첫 페이지가 끝나기 전에 눈을 감고 지친 잠을 잔다. 그런데 이 노동을 견디고 오래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노동을 견디고 오래 일을 한 뒤 마침내는, 천천히 밥을 짓고, 찌개를 푹 끓이는 동안 콩나물이나 오이소박이 같은 걸 먼저 집어 먹는 그런 삶으로 진입하고 싶다고. 그와 나는 같은 꿈을 꾼다. 나는 이 노동을 빨리 끝내고 마침내는, 천천히 밥을 짓고, 찌개를 푹 끓이는 동안 콩나물이나 오이소박이 같은 걸 먼저 집어 먹고 싶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나보다 한 가지 정도는 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활을 위한 노동이라는 게 빨리 늙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사실은 나도 그것을 안다. 어떤 식사도 노동과 분리할 수는 없다. 찌개가 끓는 동안 즐거운 건, 찌개가 끓기 이전에, 그와 나의 노동이 지글지글 끓었기 때문이다. 냄비의 온도는 그렇게 달구어지는 것이다.



나도 알긴 아는 것들이다. 다만 알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 당신이 옳지. 하지만 내가 틀린 건 아닐 거야. 나는 무쇠냄비를 사랑할 따름이야. 무쇠냄비는 노동하는 우리를 닮았지만, 우리가 무쇠냄비일 수는 없지. 나는 그냥 좀 빨리 늙고 싶어. 그때가 되면 내가 저 냄비를 바꿔야 하겠지? 괜찮아, 가볍지만 맛있어지는 그런 냄비를 새로 사면 돼. 그걸 우리 둘 사이에 두고는, 어떤 날의 저녁에는 10년 전의 노동을, 어떤 날의 점심에는 일 년 전의 수고를, 어떤 날의 아침에는 오늘의 아쉬움을 썰어 넣어 지글지글 끓여 먹자.


하루에 삼년을 늙고 그렇게 열흘을 산 다음에는
느리게, 느리게
하루가 사흘인 듯 살아야지.
뜨거운 해가 늙은 나무 꼭대기에 걸릴 때가 되어서 저절로 눈이 떠지면 서두르지 않고
얼갈이 배춧국을 끓여 후룩후룩 먹다가
문득 삼십년 전에 다급한 마음으로 미처 다 먹지 못하고 식탁 위에 남겨둔 김치찌개와
식어버린 밥 한 공기 떠올라 목구멍이 뜨거워져도
눈물 같은 걸 흘리는 대신 주름진 웃음으로
국그릇 밥그릇 깨끗이 비워
쪼르르 흐르는 물에 훌훌 헹궈내고 볕이 스미는 창가에 가지런히 포개놓아야지.
저녁에는 그의 팔뚝과 나의 종아리에 맺힌 서러운 근육 한 점씩 떼어 구워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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