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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Dec 05. 2018

유럽 생활이 낭만적이냐고요?

하루살이 낭만주의자의 길

 영화 찍을래?

고등학교 졸업 전, 졸업영화는 마지막 미션이었다. 이 보다 몇 해 전, 맥이 끊겼던 방송부를 다시 세웠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설에 숟가락을 얹었다. 개국공신들은 방송을 업으로 삼고자 했던 친구들이다. 내 팔자는 카메라나 방송기기와 멀었다. 여느 학창 시절이 그렇듯, 흐름에 이끌려 방송부를 차렸다. 이후 활동들은 주역들이 끌어줬다. 생소한 방송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던 친구들. 졸업영화에서도 그들이 주축이 돼줄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 제3 외국어에 감탄하며 친구들을 도울 셈이었다.     


카메라 잡던 친구는 8mm 보다 세 배는 큰 장비를 다루며 일하게 됐다


문제는 다음에 발생했다. 주인공이 나였다. 장르는 로맨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오마주한 작품이 될 예정이었다. 우리 영화에서 에단 호크가 돼야 했다. 극 중 제시는 셀린을 호기롭게 사로잡았지만 모태솔로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더구나 단 하루 만에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꿰차야 하는 역할이었다. 매번 짝사랑만 하다 흐지부지된 게 연애 전력의 전부였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연기니까. 촬영을 감행했다. 그렇게 고등학생들이 꾸민 하룻밤 사랑이야기는 24시간 8mm 카메라에 담겼다. 지금은 덩어리 진 추억만 남았다. 세세한 이야기는 희미해졌다. 역할에 소극적이었던 기억이다. 아쉬웠다. 허나 퍽 행복했던 기억이다.      


16년 후, 그 영화는 런던 여행에서 오버랩됐다. 빅벤과 런던아이가 자리를 비운 하룻밤의 런던은 비 내리는 골목길 이야기로 채워졌다. 회색빛 하늘, 부슬비가 떨어지는 런던에 5년 묵은 이야기보따리를 내려놨다. 농익은 이야기들로 어깨가 적적하게 젖었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강가 끝자락에 있던 펍에서 한번, 끝끝내 찾아낸 조그마하고 빨간 재즈바에서 두 번 말려냈다. 템즈강이 익숙해질 때쯤 더블린으로 돌아왔다. 소중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돌아오는 공항버스에서 알아챘다. 못 가본 곳보다 못 뱉은 말들로 속상하다. 지금은 그 기억을 연료로 삼아 버티는 중이다.     


런던도 더블린도 강에 갈매기가 산다. 섬나라라 그런가보다.


그 하루들을 살아야 했다. 이미 진부해진 거창한 말을 마음 한편 어딘가에 박아 두었다. ‘Seize the day’나 ‘Carpe diem’을 삶의 척도처럼 여겼다. 애플의 아버지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 하루가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식의 주문을 외웠겠지. 미국 시총 1위 기업은 이 다짐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네 소시민들에게 다짐들은 사뭇 다르다. 휘발성이 강하다. 붙잡아두려 해도 날아가 버린다. 무한 작심삼일을 반복하지만, 다이어트를 하며 치킨을 뜯는 식이다. 내 오늘은 무미건조한 어제에서 밋밋한 내일로 이어지는 하루였다. 더블린의 삶은 서울의 생활과 극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울타리가 사라졌으니 더하면 더했다. 유럽의 로망은 여기에 없다. 이는 이미 노골적으로 피력해왔다.      


하루 살기는 철학자들도 주창해온 개념이란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른바 ‘실존’도 같은 맥일 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불안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 이 불안함은 무(無)에서 비롯된다. 원래 있다가 없어졌든, 애초부터 없었든 둘 다 ‘무’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되려 결정장애에 시달릴 때 우리는 ‘무’를 경험한다. 수백 가지 메뉴들 앞에서 서성이는 우리들. 사물들에 둘러싸인 외딴섬이 된다. 모든 사물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때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유나 상상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선택하고 실천해야 자유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을 실현해야 실존한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면 망상이며 자기기만이란 말이다.      


10대의 끝자락, 둘도 없을 마지막 연휴였다


낯섦이 현실이라면 그곳에서 빠져나와 다른 일을 실제로 벌여야 나를 세울 수 있다는 설명일까. 프랑스 철학자 발톱의 때만큼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힌트는 얻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세계를 탈출해야 한다. 일탈을 감행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그 날의 기억들은  꽤나 발칙했고 낭만적이었다. 울타리를 넘어 그 날들에 진심을 다했고 스스로 그 상황들에 매료됐다.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는 기억들이다. 감행의 결과일까.       


다시 오늘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이다. 어제도 오늘이었을 테고, 내일도 그날의 오늘일 테다. 우리는 오늘의 연속에 살고 있다. 낭만은 지금 여기서 태어난다. 낭만은 뒤돌아서야 드러나지도, 시간이 이를 침전시키고 농익게 만들어야 비로소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 영화가, 그 여행이 낭만적이었던 이유는 마음을 온전히 던진 선택들 이어서다. 오늘은 4파운드 아이스크림과 같다. 녹기 전에 맛보고 즐겨야 한다. 마침 영화 <어바웃 타임>을 맺었던 대사가 기억이 난다. 주인공의 대사로 다시금 끝을 갈음한다.       


우리는 삶 속 매일을 여행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우리가 사는 동안 이 훌륭한 여행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는 것이다.
(We are all trave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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