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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Feb 21. 2020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닌데

"예? 12학점을 더 들어야 한다고요?"


막학기 취준생. 신분상 아직 학생. 취업을 준비하는 백수와 8년 차 대학생 사이 어디쯤 내가 있다. 내일은 아마도 마지막 수강신청이 될 터이다. 내 딴에는 완벽하게 학점을 계산했다. 지난 8년 동안 들었던 수강학점과 취득학점을 고려해 마지막 8차 학기를 마무리 지을 차례다. 피날레만 장식하면 된다. 그것도 조용하게. 고요하게. 쥐 죽은 듯이. 28살 4학년은 2020년 1학기에 존재하면 곤란하니까. 그래도 기승 '전' 결이라 했던가. 방심하면 안 된다. 말년병장처럼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 위험은 도처에 도사린다. 만에 하나. 그래 그 빌어먹을 '만에 하나'가 발목을 잡는다. 며칠 전 학과 사무실에 두 발로 찾아갔다. 수강지도를 받으러.


학교는 나를 쉽사리 놔주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 적어도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 3학점은 12학점으로 불어나 있었다. 음,,, 응? 아니, 그럴 일 없다. 작년 7월, 아일랜드에서 귀국한 다음날 학과 사무실을 찾아서 수강지도를 받았다. 30인치 캐리어를 들고 허겁지겁 이야기를 들었지만, 계산은 정확했... 던 걸로 기억한다. 작년 겨울, 2학기가 끝날 때쯤 한번 더 받았다. 이상 없었다. 막학기에는 1학년 때 F폭격을 받은 수업 한 개만 해치우면 됐다. 광란의 1학년을 보낸 후폭풍이라 생각하며 감내할 생각이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Souza)의 시구를 신봉하며 지냈던 그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냈으니. 돌아보면 내일의 나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어제의 나를 쉼 없이 꾸짖었다. 그런대로 잘 지냈으니 된 건가 싶네.


아포칼립스적 결말을 부정하며 30년도 더 된 건물을 내려와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흡연장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연기 한 모금, 두 모금. 따뜻한 입김과 함께 연기는 입과 코에서 뿜어져 나와 공중으로 흩어졌다. 생각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 뭉게뭉게 등장했다. 잡념이라 여기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고민과 걱정이라고 말하면 거의 정확하다. 담배가 참 그렇다. 생각 촉매제랄까. 뇌가 스팀팩을 맞은 듯 여기저기로 고요하게 날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니까.


가만 보자, 3학점에 1과목이라 치면 수업 4개는 들어야겠네. 1주일에 12시간은 족히 들어갈 테고. 그럼 취업준비는? 하루에 몇 번 펼치지 않는 취업 문제집이 떠오르는 아이러니. 초겨울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지원하는 족족 떨어지는 이 마당에 취업준비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불확실한 미래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투척하는 짓이 미약하게나마 기대와 희망을 주니까. 이 둘을 연료 삼아 며칠씩 연명해야 하니까. 참, 아르바이트는 어쩌지. 시작한 지 채 1달도 안된 아르바이트 걱정도 됐다. 그래, 생활비! 야간 알바나 주간 알바를 구해야 하나. 근로장학생도 있으니까 괜찮은 건가. 참 근로장학생은 학점 커트라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학교를 설렁설렁 다녔던 지난 8년의 나를 저주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거지? 작년 수강지도 때, 계산 실수를 잡아주지 못한 조교 탓인가. 비행기에서 내린 지 채 10시간도 되기 전에 허겁지겁 학과 사무실로 찾아가서 그런가. 아니, 귀국을 일찍 했어야 하나. 그보다 아일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면 안 됐었나. 1년을 그곳에서 미리 놀아버렸으니 말이야. 학교를 마무리하고 다녀왔어도 됐잖아. 교환학생을 다녀왔어도 좋았을 텐데. 한국 밖에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은 둘째 치고, 일단 한 학기는 정규학기로 인정이 되니까. 아니야 8년 동안 학교에 머무른 사실 자체가 문제야. 휴학을 이렇게나 많이 해버리면 안 되지. 결국 졸업할 거였잖아. 그나저나 그 망할 12학점은 애초에 남아있던 거잖아. 내가 한번 더 확인을 했어야하지.  


담뱃잎이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열기가 검지와 중지 사이로 느껴졌을 때가 돼서야 알아챘다. 바람에 타들어간 담뱃재가 필터 끝에서 떨어졌다. 문제의 원인도 나로 딱 떨어졌다. 상황을 야기한 근원이 나로 환원됐다. 형사 드라마 속, 거미줄처럼 엮긴 용의자 관계도에서 그 중심에 서있는 미지의 물음표 범인. 그게 나로 귀결됐다. 젠장, 결국 문제는 나한테 있었네.


오래된 강의실을 개강맞이 꽃단장시키는 근로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만 먼지를 날리며 서성였다. 방학이라 그런지 한산한 학교. 신종 바이러스 때문인지, 더 서늘한 학교. 봄바람을 가장한 겨울 공기가 뺨을 때렸다. 그런데 말이야. 억울해. 적어도 이게 내 문제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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