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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Mar 17. 2020

배우와 취준생은 닮았다

촬영 아르바이트를 다녀오곤

 촬영장의 적막은 오래가지 못했다. 약속시간 오전 9시를 넘기자, 촬영 스텝들이 제비처럼 하나 둘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인물이 훤칠한 남자 주연 배우가 시작을 끊었다. 90도 폴더 인사를 여기저기 해댔다. 짐꾼 1번인 나에게도 인사하길래 받아뒀다. 나에게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 배우 뒤를 카메라 감독처럼 보이는 사람이 밟았다. 감독을 따라 붐 마이크 담당과 조명 담당 스텝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딸려 들어왔다.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나 보다. 이어 조연들과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자리를 잡았다. 현장은 꽤나 넓었는데, 사람들과 장비들이 자리를 꿰차니 비좁아 보였다. 총괄 감독이었던 지인은 부산한 현장에 질서를 부여했다. 짐꾼 1번은 질서 틈에서 현장을 관망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촬영장 곳곳에서 감독이 액션을 외쳐댔다. 붐 마이크와 조명, 카메라 담당은 감독의 사인에 맞춰 이리저리 장비를 클리크 수정하듯 조정했다. 액션과 액션 사이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들도 배우들 얼굴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리고 파운데이션을 바르며 나노미터 단위로 요리조리 매만졌다. 외모가 눈에 띄게 달라지진 않아 보였다. 프로들만 보이는 디테일의 힘인가 보다. 배우들은 스텝들의 노고에 보답하듯 열연을 펼쳤다. 프레임 뒤편에서 배우의 연기를 엿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 최대한 뜯어보며 머릿속에 박아 넣으려 했다.      


배우는 요상한 작자들이다. 대사 한 문장 한 문장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뱉어낸다. 허나 그 모든 문장을 어떻게 외우는 가는 둘째 치고, 그들은 마치 우리가 평소에 친구랑 이야기하는 듯 입에서 밖으로 흘려보낸다. 사석에서 그들과 말을 섞어 본 적 없으니, 프레임 속 그들의 모습이 진정 본인이라고 주장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판이다. 야단법석을 떨던 사람이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주윤발처럼 진중해지기도, 차가운 시선을 날리던 사람이 레이철 맥아담스처럼 사글사글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카메라 롤 사인에 맞춰 본연의 모습을 온데간데없이 감춰버린다. 마치 ‘나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어요’라고 속삭이듯 대사를 외고 표정을 짓는다.   

    

연기는 팬터마임 같다. 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를 팬터마임이라고 한다. 흔히 개그맨들이 코미디 프로에서 자기 앞에 진짜 벽이 있는 것 마냥 손목과 고관절을 오밀조밀하게 움직여 투명 벽을 표현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이를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처럼 다루는 모습이다. 배우들이 본래 자신의 개성이 어떠하든 극 중 역할에 충실한 상황처럼 말이다. 카메라가 돌면 그곳에는 배우 자신은 없다. 극 중 캐릭터만 있을 뿐이다. 카멜레온처럼 어떤 역할의 옷을 입든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배우에게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을 얼마나 잘 지우냐가 연기의 관건이지 않을까.      


영화 <버닝>에서 혜미는 귤을 까먹는 팬터마임을 선보인다. 왼손으로 투명한 귤을 들고, 오른손으로 귤껍질을 한 꺼풀씩 벗긴다. 그녀는 자신이 귤을 먹고 싶을 때마다 항상 귤을 먹을 수 있다며, 허공에서 귤 한 알을 떼어낸다. 그 귤을 입에 집어넣고 오물조물 씹더니, 이내 귤껍질을 입에서 뱉어내는 시늉도 한다. 아인슈타인처럼 혓바닥을 내보이며 다 먹었다고 보여준다. 끝으로 그녀는 팬터마임은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도 덧붙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돼    
 

취준 생활은 팬터마임이다. 취업 준비 과정 곳곳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나는 없다. 자소설이 그 결정체다. 20년을 1,000자에 녹여내며 인생을 나답게 전시하면 틀린 글이 된다. 가장 나 다운 글은 안드로메다에 던져버려야 한다. 상황과 위기, 이를 극복하는 과정과 스스로가 얻어낸 결과물을 지원한 회사의 모토에 맞게 편집해야 한다. 이때 지원한 회사에 적합한 것처럼 보이는 나는 버려야 한다. 그런 인재는 애초에 없었다. 그를 없애야 비로소 작품이 탄생한다. 그럴듯한 자소설은 무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글 보다, 그런 일이나 생각, 의도는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글이다. 간혹 비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것조차 잊히게 하는 자소설이다. 결국 가장 나다운 글을 쓰지만, 가장 나를 잘 지우는 게 정답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하지만, 결과물을 다시 읽으면 오묘한 위화감이 드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지와 희망이다. 빈틈을 채우려는 행동을 일으키는 가능성이 그곳에 있다. 반대로,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인정과 내려놓음이다. 포기이자 자기기만이다. 본래 내 모습에 더 이상 가능성을 첨가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배우다. 박수를 받으려면, 나를 광고할 때 최상의 나는 사실 없다고 믿으며 말하는 배우. 그곳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되물으며 웃픈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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