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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Jan 29. 2023

섬세한 일터, 집무실의 생각법

48일 동안 지낸 워크 라운지, 집무실 경험 회고록(1)

"나를 위로하는 누군가의 음악도, 뚝딱 나온 게 아닐 것임을 깨닫고
그간 나의 어머니가 그린 그림도, 무심코 보던 어제보다 더 깊어"
<Smoking Dreams - Jazzyfact>



감동

정성에서


정성을 읽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글자 하나하나를 연필로 느리게 눌러 쓴 손편지, 밤새 푹 고아낸 뿌연 사골 국물, 저 멀리서 한 걸음에 찾아온 친구의 방문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정성은 참 비효율적입니다. 왜 그렇잖아요. 손편지 대신 카톡을, 진짜 사골 대신 천 원 사골 라면 수프를, 직접 만나는 대신 영상통화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효율을 외치는 시대에 비효율이라니.


그런데 정성은 그 비효율에서 비롯되는 건 않을까요. "나를 위로하는 누군가의 음악도 뚝딱 나온 게 아니"라는 빈지노의 노랫말. 그 가사처럼 고민과 노력을 거듭하는 비효율적인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정성 어린 무언가가 세상에 나올 가능성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워크 라운지 '집무실'에서 같은 정성을 느꼈어요.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내며, '이렇게까지 했다고?'라곤 크고 작은 감동을 받은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분명 대우받고 존중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찜질방 회원보다는 료칸 손님이 된 느낌이랄까요. 자유도가 높은 놀이동산이 아닌 잘 짜인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게 되는 호텔 라운지에서 드러나는 감각. 비단 이 공간 곳곳에서 발견한 문장들, 섬세하게 꾸린 어메니티만으로 느낀 감동은 아닐 겁니다.


집무실의 문장들


감동의 이유를 찾고 싶었습니다. '집무실 팀도 공간 기획에 비효율적인 시간을 들이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비효율적인 정성으로 근사한 일터를 찾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려했던 건 아닐까'하며 서툴게 짐작했어요. 그들의 생각에 방향이 있다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자 시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48일 동안 집무실을 다니며 "넘겨짚은", 집무실의 생각법을 회고합니다.





플롯으로

맥락


개인 취향입니다만, 이유 있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대체 왜 그런지, 맥락과 의도의 배경을 알게 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결과물들. 소위 플롯 설계가 잘 된 무언가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설계한 사람의 의도가 제게 적확히 꽂혔을 때 기분 좋은 패배감이 들어요. 매력적인 플롯에 시원하게 설득당해 버린 거죠.

 

맥락, 의도, 배경, 플롯... 집무실 이야기를 하다가, 문학의 이해 수업에 나올법한 내용을 꺼낸 이유는 '리커 스탠드'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집무실의 리커 스탠드. 집무실 크루가 함께 했던 '슈거&리커 타임', 오후 6시 이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나이트 리커 서비스'가 '리커 스탠드'로 통합됐다.

집무실에선 위스키를 마실 수 있습니다. 무료로요. 진짭니다. 이 서비스를 '리커 스탠드'라고 불러요. 원래는 오후 3시와 오후 6시에 각각 운영됐던 '슈거&리커 타임'과 '나이트 리커 서비스'가 있었는데요. 두 서비스를 24시간 리커 스텐드로 합쳤습니다.


일터에서 술이라니. 이상합니다. 왜 줄까요. 집무실이 고객들에게 '일만 하는 공간'으로 다가가지 않길 바랐다고 합니다. 집무실은 일터에서 일을 줄이고, 그 빈 공간을 휴식으로 채웠어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일을 생각하는 시간만큼이나 안정을 취하며 딴생각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시간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을 명백하게 나눴다기보다는 두 시간이 융화되길 의도한 듯 보였어요. 그러니까 워라벨(Work-Life balance)보다는 워라블(Work-Life blend)를 제안한 것이죠.


"저희는 집무실이 단순히 일만 하는 공간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퇴근길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서 바에 앉아 위스키 한 잔 마시며 책을 보고 충전된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일상에 녹이고 싶었습니다. 일종의 퇴근길의 마침표가 되는 공간이길 바란다는 마음일까요."
<집무실 이야기 01> 중


노르웨이 브랜드 '푸글렌(Fuglen)'. 커피와 칵테일을 함께 판매하며, 커뮤니티 존의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랑방 내지는 아지트 정도이지 않을까.


퇴근길의 마침표가 되는 공간. 이 생각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집무실은 노르웨이 브랜드 '푸글렌(Fuglen)'을 떠올렸다고 해요. 푸글렌은 카페이면서 바(Bar)입니다. 아침엔 커피를 마시고, 느지막이 다시 찾아가면 칵테일을 맛볼 수 있어요. 도쿄 요요기 공원 근처, 주택가에 이 푸글렌 매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상컨데, 집무실 팀은 리커 스탠드를 디자인하며 푸글렌에 앉아 수다를 떠는 퇴근길 직장인들과 슬리퍼 신고 나온 인근 주민들을 떠올리진 않았을까요.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런 공간이 생기길 바라는 작은 욕심을 부리진 않았을까요.


리커 스탠드를 빚어낸 생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집무실 팀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도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술을 건네는 바 스테이지. 집무실 거의 모든 지점에는 이 바 스테이지가 있어요. 그리고 리커 스탠드도 이 바 스테이지에서 운영돼요. 바 스테이지는 대체로 집무실 공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을 열면 곧장 마주하거나(왕십리점), 넓은 워크 라운지를 좌우로 나누는 축(서울대입구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집무실은 워크 스페이스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과 집무실 왕십리점 바 스테이지


이렇게 어떤 공간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기물은 그 공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공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드러내는 역할을 맡기 때문입니다. 바 스테이지만큼 집무실의 제안력, 그러니까 '워라블'을 표현한 요소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만으로 일터를 채울 생각이 없어 보이거든요.


누군가는 이 그림에서 도시인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는데, 저는 참 좋았습니다. 왜 좋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바(Bar) 특유의 구조가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 간의 적절한 거리감을 통해 프라이버시는 보장하면서도 혼자 있다는 고독감을 줄여주는 느슨한 연결이 가능한 공간이라고 이해됐어요.
- 집무실 CEO 김성민 님


가만히 보면, 집무실의 의도엔 항상 맥락이 있었습니다. 맥락은 말 그대로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입니다. 맥락이 앞서야 듣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법이 잖아요. 맛집엔 꼼꼼하게 선별한 재료와 실력 있는 셰프가, 명품엔 고집스러운 장인정신과 유구한 역사가 있듯이요.


집무실 일산점의 오브제. 옛 KT 전화국에 있던 교환기를 재해석해 설치했다고 한다. 교환기가 품은 이야기를 현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선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이 맥락은 플롯에 기인합니다.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야기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면, 플롯은 인과에 힘을 싣습니다. 여기에 화자의 과거, 욕망, 경험, 약점/강점이 가미되면 플롯의 완성도는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 (...) 왕이 죽었다는 사건과 왕비가 죽었다는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 스토리지만, 두 사건에 인과관계를 부여해 왕이 죽자 슬픔을 못 이겨 왕비도 죽었다고 표현하면 플롯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집중하게 되는 것은 실상 이 플롯의 완성도에 기인한다.
책 <맥락을 팔아라> 중


집무실이 맥락을 쌓는 방식은 다른 여러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옛 KT 전화국 기계장비실을 리모델링한 집무실 일산점에선 바 스테이지 뒤편엔 오래된 '공기 조화기(AHU, Air Handing Unit)'를, 과거 철도하역장을 탈바꿈한 집무실 왕십리점에선 기차 역사 매표소를 떠올리는 바 스테이지를 만날 수 있어요.


마치 옛 기차역을 재생한 파리의 오르셰 미술관, 화력발전소를 문화발전소로 바꾼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처럼 공간의 흔적을 어떻게든 기억하고자 하는 집무실만의 생각법이, 두 곳의 바 스테이지에 반영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거창한 공간재생'은 아니지만요. 한편으론 공간의 과거를 끊어내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잠시

멈춰갈게요


이 글은 시쳇말로 '공간 브랜딩'. 그러니까,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브랜드의 메시지를 제안하는 방식을 해독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정말 많아요. 공간의 위치부터 그 공간의 과거 쓰임, 조명, 오브제, 음악, 향기, 여타 글과 사진, 영상 콘텐츠, 공간을 운용하는 스테프까지 설계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 즐비합니다. 여기에 공간의 실황을 확인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나 공간 기획에 참여한 제3의 조직들까지 고려하면 차고 넘치죠.


플롯으로 맥락을 담은 바 스테이지와 리커 스탠드 외에도 집무실은 그들만의 여러 생각법을 곳곳에 녹였어요.


예컨대 집무실은 '쉴 수 있는 선택권'을 전한다며 휴식 공간을 '데이드림 스탠드(Daydream Stand)', '소셜 벤치(Social Bench)', '라탄 살롱(Rattan Salon)', '하이드 아웃(Hide-Out)'으로 나눴어요. 또 여러 일 방식을 모두 존중하는 마음을 다시 '네스트(NEST)', '케이브(CAVE)', '하이브(HIVE)' 등 여러 워크 모듈로 표현해 냈습니다. 이런 도전에선 '정의를 다시 분할 재정의' 하는 집무실만의 노하우가 보였어요.


왼쪽부터 네스트, 케이브, 하이브. 개인적으로 네스트를 선호한다. 열려있지만 개인적인, 아이러니한 워크모듈이다.

아울러, '숫자로 감각을 디자인하는 과감함'도 훔쳐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공간의 분위기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음악과 향기'나, 낮과 밤을 나눠 같은 공간을 다르게 연출하는 '나이트 시프트'처럼 느낌과 감으로 행할 듯한 기획도 그 뒤엔 숫자와 데이터가 있다는 사실. 이 넓은 공간을 구성하는 오브제와 서드파티 서비스들이 사실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결코 과하지 않는 절제력도, 집무실 팀은 지닌 듯 보였습니다. 오케스트라처럼, 그것 음악이든 가구든, 크루든 앱이든 어느 하나 튀지 않거든요.

집무실 왕십리점의 밤

조금 더 느리게 집무실을 살펴보며 글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집무실의 생각법 전부를 읽어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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