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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 Sep 10. 2020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영화 <82년생 김지영>

코로나를 막긴 막아야겠는데 그러다 국민들의 삶이 끝을 모르고 꺼져버릴지도 몰라 걱정스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대안으로 나온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다 같이 허리띠 졸라매고 힘든 시기 버텨보자는데 나만 청춘과 낭만을 핑계 삼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앱을 켜고 가장 길게 대실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음식을 포장해서 들어가 영화 2편 정도 보면 그 날의 데이트로 충분하겠다 싶었다. 


보송보송하고 하얀 침구에 파묻혀 리모컨을 열심히 누른다. 넷플릭스를 켜 왼쪽, 아래쪽 이리저리 눌러보지만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 손이 방황하게 만드는 대형마트 스낵코너에 간 기분이랄까. 그러다 한 영화가 눈에 들어온다. '82년생 김지영'. 작년 가을,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시사회 이벤트에 당첨되어 혼자 퇴근 후 잠실 롯데시네마에 가서 본 적이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에 휩싸여 펑펑 울며 봤던 그 영화. 혼자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그 영화.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인 내 애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애인은 내가 한 번 본 영화를 본인 때문에 내가 다시 보는 게 싫다고 해왔던 터라 거짓말을 좀 했다. "나도 이 영화 보진 않고 짤로 부분부분만 봤는데, 이거 볼까?" 크게 호불호가 있지 않은 내 애인은 흔쾌히 그러자고 한다. 나는 아무래도 두 번째 보는 거다 보니 이 장면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올지 알고, 어떤 포인트에서 눈물이 나올지 알기 때문에 이번엔 담백하면서도 씁쓸하게, 헛헛하면서도 짠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직장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험, 불안함이 한껏 올라오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도 없어 이를 악물고 공공화장실을 이용했던 경험, 명절에 시댁에 가 뼈빠지게 일하면서 눈치는 눈치대로 보는 불쌍한 우리 엄마를 보며 속상하고 불편했던 경험. 내가 아이를 낳아보진 않았지만 아이를 낳아봤던 엄마의 삶을 옆에서 지켜봐온 시간이 있기에 영화 속 상황들이 나에게 당시의 감정들을 소환하는 역할은 해주었지만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게 해주는 역할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성별을 가진 내 애인에게 이 영화는 또 다른 의미였다. 자기 눈에만 보이지 않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듯한 경험을 한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이 영화를 볼 당시, 애인은 회사에서 은근하게 상처 주는 말들을 계속해대는 여자 대리 때문에 힘들어했었다. 사람이든 음식이든 호불호가 강한 일이 드문 그가 유난히 그 대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대리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82년생 김지영'을 다 보고 나서 코를 훌쩍 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 대리님한테 이제 짜증 안 내야겠다." 주인공이 겪는 사소하면서도 깊은 생채기를 내는 일상 속 어려움들의 존재 자체를 그는 몰랐다고 했다. 남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설명하지 못한 각자만의 사연이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 깨닫게 되었다며 한참을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남자가 알지 못하는 여자의 힘듦이 있듯, 여자가 몰랐던 남자의 힘듦도 있을 테고, 딸은 몰랐던 엄마의 힘듦, 막내는 몰랐던 첫째의 힘듦, 사원은 몰랐던 이사의 힘듦까지. 우리 모두 누군가의 힘듦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지금까지도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화생방 가스처럼 내 눈앞을 가린다. 김지영이 아이를 돌보다 카페에서 커피를 엎질렀을 때, 그녀가 걸어온 시간과 상황, 감정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완벽한 타인이 맘충이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써가며 내두른 섣부른 폭력성이 사실 우리 안에 조금도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쟤는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며 매도해버리는 방법은 쉽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려버리면 그만.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은 지난하다. 왜 그랬을까, 그 서사를 추측해보고, 그 서사 속에 느꼈을 당사자의 감정을 상상해보고, 그렇게 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화를 솜이불 같은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불같은 감정을 꺼뜨리는 것. 계속해도 꺼지지 않는 그 불씨를 이불로 몇 번이고 다시 두드려 끄는 그 과정에서 내가 조금 타들어가더라도 상대가 전부 소실되어버리지 않게 지켜주는 것. 그 과정을 감내해내겠다는 결심을 한 사람만이 기분 좋은 자아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 그 영화 보기를 잘했다고 툭툭 되뇌는 애인. 본받고 싶은 성숙한 삶의 태도였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두고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작품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아내를 이해하는 일, 내 남편을 이해하는 일, 내 딸을 이해하는 일, 내 친구를 이해하는 일. 우리는 대부분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무인도에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정치적 성향이나 기호를 떠나 인간(人間)이라는 한자 그대로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모두가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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