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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 Sep 11. 2020

버티는 직장인끼리의 전우애라고나 할까요

책 <일의 기쁨과 슬픔>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견딜 수 없는 노동의 무거움을 이야기하고 싶다. 돈을 버는 일이야 형태가 어떻든 힘든 것이지만,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직장인의 생활에는 즐거움보단 괴로움이 더 잦다. 괴로움보다 즐거움이 큰 일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현실의 계산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랐다. 그 대가를 감당하려면 겨우 세워놓은 일상의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기쁨과 슬픔 사이를 부유하고 사는 게 직장인의 일상인 줄 알면서도 헛헛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비슷한 상황에 처해봤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것이 신세한탄에 그칠 지라도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공감해주니 카타르시스가 차오른다. 안나가 거북이알의 사연을 듣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테이블 아래까지 떨어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을 때 느꼈을 달콤 씁쓸한 전우애를, 나도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으며 작가와 나눌 수 있었다.


김수진 작가의 소설 ‘9번의 일’에서 주인공은 퇴직을 종용하는 회사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버텨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이런 식으로 무엇을 얼마나 지켜내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계발서에서처럼 쿨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와 세계여행을 떠나거나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할 수 없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현실 속에서 내 마음을 지켜내고 나름의 창구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런 맥락에서 안나와 거북이알의 행동에 힌트가 있다.


1단계, 받아들임. 대표의 기분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 상황이 와도, 내 뒤에 앉은 직장동료가 나를 향한 한숨을 태풍처럼 몰아쉬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 뾰족한 대안이 없다. 이직을 한다고 한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직 역시 복권이기 때문이다. 긁어봐야 결과를 안다. 그러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다.


2단계, 나를 챙기기. 안나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나를 챙긴다. 삶이라는 게,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남에게 나를 챙겨달라고 엉뚱한 방식으로 떼를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괜히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외롭고, 서럽다. 그 화살은 사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향해 있다. "너(나) 왜 내 비위 안 맞춰줘? 내가 힘들다고 했잖아!" 내가 내 비위를 맞춰야 남의 비위도 기꺼이 맞출 수 있게 된다.


3단계, 타인을 챙기기. 내가 내 비위를 맞춰주다 보면 기분이 슬금슬금 좋아진다. 어? 좀 괜찮은데? 입꼬리가 들썩들썩, 엉덩이가 씰룩씰룩, 어깨가 으쓱으쓱. 기분이 좋으니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자신에게 한숨도 칼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줬던 동료 캐빈에게 선물도 사줄 줄 아는 보살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비로소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나를 챙기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챙겨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힘들어서 나를 챙기려는데, 나를 챙기려고 또 노력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입맛에 맞는 맥주를 찾는 것에서부터 내가 사는 공간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 뭉친 몸을 풀어주는 것, 기분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 일상 속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방법이야 무엇이 되었든 내가 기분 좋은 일이면 그거면 됐다. 나를 위해 했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 이자는 내 옆에 있는 전우를 향한 배려와 이해로 발현될 것이다. 우연히 눈을 마주쳤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웃음을 지어보여준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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