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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Feb 09. 2024

연휴의 단상

맥락 없고 느슨하기 그지없는 최근의 짧은 글과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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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발매된 윤종신 정규 9집 음반 '그늘'을 좋아한다. 아티스트의 의도에 맞춰 배치된 트랙들이 청자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를 그려주고 마지막 곡이 끝나는 그런 앨범. LP, 테이프, CD와 같이 손 끝에 촉감이 느껴지는 물리적 매체는 언감생심, 정신없이 휙휙 넘어가는 십여 초짜리 숏츠의 시대에 하나의 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듣고 가사를 곱씹어보는 그런 경험은 너무나도 귀해졌다. 


정승환의 데뷔 EP '목소리'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애정하는 앨범이다. '写真家として森に入り、詩人となって出ていった。'(사진가로 숲에 들어가 시인이 되어 나왔다.) 1983년 일본 올림푸스 카메라 광고에 사용된 인상적인 카피가 연상되는 그런 앨범이다. 멜로디와 가사가 어우러지면서 듣는 어느 순간 눈 내리는 고요한 숲으로 들어가 쌓인 눈을 밟으며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알게모르게 쌓인 정키한 미디어의 해독을 위해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과 이와이슌지의 영화 '러브레터'를 주기적으로 봐줘야 하듯, 이제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다 느껴지면 자연스레 찾게 되는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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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알고 있으면서 쉬쉬하는 걸 지도 모르겠지만, 아이폰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상당수 이미 재미없어진 지 오래다. 사파리도, 음악도, 유튜브도, 인스타그램도, 넷플릭스도 그저 관성으로 열었다 닫는다. 그나마 하루 일과를 단정하게 정리해 놓은 노션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세상 비싼 기계랄까. 사람들의 눈을 작디작은 손바닥 안에 가둬두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얼굴에 뒤집어쓰고 세상과 나를 단절하자고 하는데 내 몸이 늙은 건지, 당신네 가치관이 낡은 건지 모호하다. 왠지 어제 주가에 반영된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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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이 맞은 듯 안 맞은듯한 사진이 점점 좋아진다. 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것의 옳고 그름은 더없이 상대적인데 어찌 보면 사진의 초점이 잘 맞았다고 선예도 운운하며 좋아하는 것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호쿠사이의 그림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가 연상되는 내 발밑 아래의 깨진 얼음이 아름다워 마침 마운트 되어 있던 펜탁스 67 소프트렌즈로 한 컷 담아본다. 이 사진, 초점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애매하지만 이미 충분한 이유를 설명했기에 미숙한 수동렌즈 운용이 이렇게 또 한 번 포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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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난 시간들도 이윽고 봄이 오면 얼음 녹듯 녹아 그랬었지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기에 더욱 당신과 나의 인연을 진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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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날 때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찾아 익숙한 골목길 사이사이를 걷는다. 이미 많은 것이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점점 희미해지는 추억, 더욱 선명해지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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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담기 위해 새벽어둠 속을 홀로 걷고 있다 보면 가끔 눈앞의 칠흑같은 어둠 속 풍경이 햇살이 들어오는 우리 집 거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과 대척점에 서있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서 동틀 무렵 거룩한 풍경을 아무리 많이 볼지언정 그것이 나만의 감동으로 끝나는데 이보다 이기적인 시간이 있을 수 있나 싶다.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던 서오릉에서 매일 같이 무료로 따뜻한 차를 나눠주시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로부터 투병하던 아내가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과 율무차 한 잔을 동시에 건네받았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말이 없던 아저씨와 나를 묵묵히 지켜보던 은행나무와 곁에 있던 그믐달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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