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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Jan 19. 2024

강아지 이름에  돌림자를 넣으면

"재재야!"

부르는 소리에  재재는  사무실에서 달려 나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밥 먹고  올게, 가게  보고   있어!"

남편의 이 한마디에  재재는  미련 없이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 버린다. 재재가  알아듣는 말이  점점  늘고 있다. 때로  '왜 화장실이 아닌 이곳에다?'로  시작하는 우리들의 호통에 대답하기 궁색한 말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이 개를 옆에 두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아이들이 대여섯 살 무렵, 남편은 진돗개를 키우던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강아지 한 마리를 하우스에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뭐라 부를까 잠시 생각하더니 백억이라 불렀다. 일이억도 아닌 백억, 주인의 황당한 욕심이 한껏 들어간 작명이었다. 평생  만져질 리 없는 숫자를 입으로나마 자주 불러보자며 주인은'백억아!'하고  부르며 싱글거렸다. 백억이가 제 이름을 좋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백억아!'하고 부르면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인에게 다가와  몸을 비벼댔다. 그러던 어느 날, 백억이는 산책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면 동네 한 바퀴뛰곤 했는한창 푸릇한 백억이 걸음을 쫓아가지 못한 주인은 줄을 놓아버렸고, 으레 논두렁을 뛰어다니다 오겠거니 했던 백억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뒤 백억이처럼 보이는 개가 도로변에 있더라는 이웃의 말을 들었고, 그날 주인은  하우스 뒤쪽 돼지감자 꽃이  노랗게 핀 땅속에 백억이를 묻었다.


백억이가  떠나고 들어온  진돗개는  장수였다. 주인은 '돈 그까짓 것  별거냐, 오래오래  살아다오!'라는  염원을 담아 , '장수야!'하고 길게 부르곤 했다. 하지만 장수는 주인의 바람을 거슬러 흰 눈 내린 겨울, 맘껏 뛰어다니다  오라고 풀어준 주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암컷 진순이, 바둑이가 있었고, 새끼들은  이름도  붙이기 전에  새로운 주인을 찾아  이웃이나  친척집으로  떠났다.  

 

장수마저  떠나버린 자리에 남편이 들여온 진돗개 중 깐돌이가 있었다. 백억의 꿈은 터무니없는 일이었고, 장수도 욕심만큼 명이 길지 았기에, 깐깐하고 똘똘한 입말이 굴러가는 대로  붙인 이름이었다. 깐돌이, 뭔가 얍삽하고 깨발랄할 것 같은 이름이지만  모견과 부견이 기록된 출생증명서까지 지닌 점잖고 품위 있는 진돗개였다.  

어느  일요일 아침, 깐돌이는 여느 날과  분명 달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주인의 화물차 엔진소리만  듣고도  꼬리를  흔들며 하우스 밖으로 미리 마중 나오던  깐돌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하지만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와 같이 일을 했다. 얼추 바쁜 일이 끝난 뒤에야   옆에 다가가  '깐돌아!'라고  말을 걸었을 때  깐돌이는  고개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기다 항문 주변에 묻은 검붉은 피까지 보고 놀란 주인은 급히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었고, 일요일이라 힘들다는  수의사에게 사정사정해서 출장을  요청했다. 수의사는 검사를 마치고 장염도 아니고 병명을  알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조치라는  주사를 맞고 깐돌이는 조금  나아 보인 듯했으나 죽음을 감지한 남편은  뭐라고  말하듯  끊이지 않는 깐돌이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끌어안고  훌쩍거렸다.  깐돌이  몸이  점점 차가워진다며  여름 햇살아래  쭈그려 앉은 주인은  깐돌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점심때가 못 미쳐 깐돌이는 떠났다. 퉁퉁 부운  눈으로  남편은  바퀴가  하나 달린  수레에  깐돌이를 싣고  백억이가  묻힌 자리로  갔다. 하우스에서 기르던 마지막 진돗개는 그렇게 떠났다.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을 것이라고 주인은 말했다.


하지만 다음 해 4월, 한참  사춘기 중병을  앓고 있던  딸아이를  핑계로  남편은  갈색푸들을 집안으로 들였다. 부녀는 알아서 잘 키울 테니 걱정 말라며  700그램의 토이푸들과 함께 애견센터에서  권하는 신생아용품과 맞먹는 일체의 애견용품을  사들였다. 하우스에서  기르던  개들은  모두  남편이 한번 부르면   이름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온 가족이  조막만 한 갈색 털뭉치 앞에  둘러앉아 이름 짓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재재'다. 가끔 재재가  바스콘셀루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나오는 그 '제제'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요셉을 뜻하는 포루투칼어 '조제'에서 '제제'가 된  그 이름은  아니다. 단순하게 우리 집  세 아이들의 돌림자(항렬자가  아니다)인 '재'를 거듭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재재는  나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한다. 아침에 화장대  앞에서  바지를 꿰고 있으면  어느새  달려와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양말을  신기 위해 소파에  앉으면  무릎 위로  올라와 꼬리를  프로펠로처럼  빙글빙글  돌려  곧 어디로든 날아갈 기세로 내 얼굴을  핥는다. 그리고 가게에  도착하면  재빠르게   달려가  모둠발로  남편의  무릎을  찍고  빙글빙글 또 돈다. 그러면 남편은  열일 제치고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탄 후 두루마리 화장지를  몇 겹 찢어 들고 재재와 동네 산책을 나선다.  얼마 후, 남편은 녀석의  똥이  담긴 컵을 들고  돌아오고 재재는 간식을 먹는다. 일을 마치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소리가  나면  사무실 안에서   냅다 뛰어나와 퇴근하려는 나를 바라보고 앞발을  모은채   앉아 기다린다.


어느새  그런 생활이 8년 차다. 그 세월은 재재와 데면데면하던  아들들을 이제 여행 중에도  녀석을  보고 싶다고 전화할 만큼 만들어 놓았다. 재재도 아침이면  밥 달라고  제 집 문을  덜커덩거리던 강아지에서 이제  제 집은  창고  깊숙이  들여놓고  우리 방을  제방처럼  쓰고 있는 장년이 되었다. 요즘 들어  한술 더 떠 아침이면  비어있는 아들방에서  나온다. 아직까지 제  오줌 한 번  갈기지 않는  성역의  방을  제방으로  찜한 모양이다.


이름에는 이름 짓는 자의  일방적인 욕심이 들어있다. 내 이름에는 곧은 마음이 맑은 물처럼 흐르는 사람이 되라는 훌륭한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 겉은 고추 달린 손자를 얻고자 하는 외할머니의 욕심이 작정하고 들어 있다. 누가 보아도 사내아이 이름이다. 외할머니는 딸도 당신처럼 살까 봐 두려웠던지 고추가 없는 세번째 손녀딸을 큰방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더니 한동네 글깨나 안다는 집에 들러 사내아이 이름을 지어왔다.

외할머니는 위로 아들과 아래로 두 딸을 두었지만 아들을 전쟁통에 잃었다. 그리고 큰 딸인  우리 엄마와 함께 살았다. 곰방대를 물고 앉아 하얗게 한숨을 뱉어내는 외할머니를 보고 아버지도 피우지 않는 담배를 피우는지 어린 우리들이 궁금해하자 엄마는 먼저 떠나버린 외삼촌과 외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가슴에 피를 뿜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아들 아닌 딸에게  얹혀사는 당신의 인생을 엄마도 답습할까 두려워 내 이름을 사내아이 이름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이름은 어느새 내가 되어버렸고, 한 번도 개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나와 찰떡인 짝꿍이 되어버렸다.  


 김춘수의 '꽃'처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 이름이란 한 영혼을 부르는 이의 세상에 끌어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이름은 세상의 온갖 밝음과 맑음과 기쁨과 희망을 부어 지어진 것이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재물을 탐했던 백억이, 무병장수를 꿈꾸던 장수, 깐깐한 사회성을 바랐던 깐돌이에서 가족의  돌림자를  붙인 재재로 변했듯 이름은 희망을 담는다. 그리고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언정 그 희망은 이름을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의 관계에 충분한 영향을 끼친다. 이름을 짓는 시점에서는 일방적인 행위이지만 이름을 부르고 불리는 자들의 관계에서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볕을 내리던 태양을 향해 해바라기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듯이.


오늘도

"재재야!"

하고  부르면 재재는  재재재재(발톱이  바닥에  닿는 소리)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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