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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Feb 13. 2024

크로와상 생일케이크

속이 말캉한 에그타르트, 포실하게  부푼 크로와상 생일케이크. 쟁반  크로와상  네 장과 에그타르트 위에 꽂은 초는 굴곡진 암갈색 꽃과 암술 수술이 되어 불꽃 피워냈다. 

"데코레이션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 엄마에게는 바삭한  바게트가  딱인 줄 알아. 하지만 초를 꽂기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했어. 그래서 다음으로 좋아하는 크로와상을 샀지. 그리고  에그타르트에 초를 꽂으면  안성맞춤일 같은 거야!"

 딸이  구구절절 설명했다.

"음, 훌륭해!"

 나는  대답했었다.


식당에  앉아  메뉴판을 바라보며 뭘 먹을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 나는 대부분 상대의  취향에  맞춘다. 하지만  유독 빵만은 어쭙잖은 색깔을  갖는 편이다. 바게트와 크로와쌍이나 종이 파이류를 좋아한다. 아마도 스물한 살, 가을에서  다음 해 여름까지 제과점에서  일한 어설픈 경험 때문일 것이다.


제빵실 안쪽에  걸린 벽시계는  이미  12시를  넘겼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불 꺼진 네온사인 간판과는 달리 제빵실 안쪽은 훤했다. 

나는 제빵실과 가장 가까운 홀 안쪽에 앉아 케이크상자를 접고 있었다. 오후 아르바이트생들도 모두 퇴근한 후였다. 카운터담당  열아홉 살 아가씨와 스물한 살 나만 남았다. 호리호리하고 새침한 얼굴이지만 싹싹했던 아가씨는 사장의 먼 친척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가을부터 종일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 2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내디딘 첫 사회생활이었다. 

밤 10시, 제과점  문을 닫은 아가씨는 제빵실  오른쪽 귀퉁이 사다리를 타고  다락으로 기어 올라갔다.  밑에서 나는 그녀가  다락 밖으로  내미는 케이크박스와 장식용 설탕과자 꾸러미를  받아 내렸다. 느 날이던가 빵 담을  봉투를 가지러 다락에  힘겹게 들어간 적이  있었다. 두서없이 쌓여있는  박스와  빵포장지 사이로  쥐똥이  굴러다녔다. 한 달에 한번 있는 휴일이면  소독업체를  불렀지만, 밤새 빵냄새에 홀린 쥐들은 주방 뒤쪽 하수구를 나와 화려한 도시의 뒷골목을 쏘다니는 모양이었다.


공장식구 여섯 명은 제각각 바빴다. 제빵실 오븐에서 시폰케이크는 가뭇하게  구워져 나와 층층이 쌓인 틀 위에서  식고 있었고,  휘핑기에서는  계속  크림이  핑글핑글  돌다가  스텐통에 담겼다. 상자를 다 접고 난 나는  시폰케이크를 얹어놓은  돌림판을  빙글 돌려가며   다리미질하듯 반듯하게 크림을  펴 바르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짤주머니에 담긴 크림은  살짝살짝 누를 때마다 애기구름 같은 물결과 꽃을 피웠다. 흰구름도 딸기구름도  초코구름도 몽실 피워냈다.  마지막으로 공장장은 짤주머니에  녹여 넣은  초콜릿으로  달달한  필기체를  흘려놓았다.

 'Merry Christmas'

가끔 우리는  설탕으로 만들어진 눈사람이나  산타인형과 푸른 전나무를 꽂는 마지막 공정을 하며 키득거렸다. 우리는 상자 안에 먼저 플라스틱 빵칼을 넣은 다음, 그 위에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새벽 두 시쯤  우리는  퇴근했지만 공장식구들은  다시 그날 만들어낼 빵을  만드느라 거의  날을  새야 했다.

아가씨는 사장이 택시 타고  들어가라고 챙겨주라 했다며  금고에서  지폐를  건넸다. 눈이 내린 길을 걸어서  자취방까지 30여분을  걸을 수는  없었다. 아가씨가 싸준 팔다 남은  빵을  몇 개 들고 묵지근한 다리와 어깨를 굽히며 택시를 탔다. 


다음 날, 아니 새벽에  퇴근한  바로 그날, 충장로에는 까맣게 떠다니는 군중들 머리 위로  캐럴송이 흘렀고 우체국 앞 구세군 아저씨의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그들의 발걸음을 쫒고 있었다.  제과점에도  캐럴송이  경쾌하게  흐르고, 빵 진열대와 카운터에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유리창 밖 들뜬 얼굴의 행인들을 멍하게 바라보다 가끔 진눈을 밟고 들어서는  손님들의 발자국을 밀대로  지우고 있었다. 

진열장과 주방 가득 쌓여있던 케이크가  모두 나가고  진열대 빵이  거의 사라지면, 다른 날 보다 이른 퇴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긴 하루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 닿자 입술에  침을  바르게 된다. 먹고 싶은  빵이 생각났다. 그것은 바로 만든 버터크림 듬뿍 들어간  빵이다. 하지만 지금  먹고 싶은 것은 아니다.  30년도 지난 그곳, 그날 아침이라면  모를까.


 유리창 너머 제빵실 안쪽에서 똑톡 유리벽을  두들겼다.  밀가루가 허옇게  얼룩앞치마, 접어놓은 돛단배 같은 모자를 쓴 공장장이었다. 그는 방금  만든 버터크림빵을  들어 보였다. 홀보다 두 계단쯤 높은 제빵실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무쌍 눈이 웃더니 그날 올려 바른 붓터치가 피워낸 복숭아빛  광대가 올라갔다. 언니는 무릎을 양손으로 한번 가볍게 치고 일어나 검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제빵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버터크림빵 한 철판을  들고 나왔다.

"얘들아, 먹고 하자!"

 언니가 제일  먼저 붉은 입술로  한입  앙다물었다.

 "나는 정말  이 순간이  너~행복해!"

"언니는 정말  버터그림빵을  좋아하는 것 같아!"

제과점에  근무한 지  가장 오래된  열아홉 아가씨는 카운터에서  웃으며  말했다.

 잠시 쌍꺼풀 없는 눈두덩이에 갈색 펄이 깜빡거리는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와 오전 아르바이트생 한 명은 언니에게 전염된 듯 버터크림을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어요! 공장장님!"

제빵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공장장님을 향해 우리들은 엄지 척을  해 보였다. 부드러운 버터크림이  혀에  감기며  고소한 빵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내가 녹아들어 가는 맛이었다.

공장장 뒤쪽 오븐에서  장갑을 낀 손으로  빵판을 꺼내던  순진한 공장 아저씨가  씩 웃어 보였다. 공장장은  홀 안 우리들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거두고 사무적인 말투로  공장식구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친절한  공장장도  공장식구들에겐 엄격했다.


  빨간  앞치마를  입은  아르바이트생들은 손님이 없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이 시간이 가장 즐거운 아침 시간이었다. 한 김 식은 팥빵, 소보로, 돌빵, 슈크림빵등이 담긴 검은  철판이  하나씩 탁자에 올려졌다. 언니는 빵집 로고가  새겨진 일회용 봉투를 훅 불어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을 사용해 마치 기계처럼  빵을 집게로 잡아넣었다. 그러면 나와 오전  아르바이트생은 봉투 끝에  붙은  필름지를  찌익 뜯어내고  접착제가  붙은  끝을 빵봉지에 붙였다. 출근해서  홀청소를  마치고 앉아  새벽부터  일어난 공장식구들이 만들어 놓은  빵을  포장하는 일은  우리 아르바이트생들 몫이었다. 그럴 때면  공장장은 방금  만든 버터크림을  빵속에  듬뿍 넣어 우리들에게  하나씩 먹어보라고  건넸다. 퇴근 무렵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쥐어주던 진열장에  남은  빵과는 확연히 그 맛이 달랐다.

이때쯤 새벽녘에야 잠들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충장로 한가운데 자리한 제과점 안에  에띠뜨삐아프의  빠담빠담이 흘렀다. 몇 곡의 샹송이 흐른 후 카운터 아가씨는 다시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 변진섭의 로라가  담긴 테이프로 바꿔놓았다.

"은행 갔다 올게요!"

 잔돈을  바꿔 채워놓기 위해 아가씨는 금고를  열어 지폐를 들고  근처 외환은행으로 갔고, 생크림케이크에  들어갈  딸기를 사들고 돌아왔다.  


  아르바이트생 중 유일하게 덜덜거리는 기계에 식빵 덩어리를 넣어 잘 썰어내던 언니는 오후에는 바텐더학원을  다니는 중이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대학생이거나, 갓 고등학교 졸업한 사회 초년생도 있었고, 몸이  좋지 않아서  쉬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장장을  뺀 대여섯 명의  제빵사들은  제과점 건물 4층  옥상 가건물에서  합숙을 했다. 1층 제과점에서  4층까지 가는 길은  제빵실  뒤쪽으로  난  문을 통해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제빵실  뒤쪽에는  주방아줌마가 플라스틱  작은 의자에  앉아  삶은 계란을 까고 양파를  다듬거나  양배추를 썰고 있었다. 그곳은 바닥에  물때와 기름때와는  다르게 계란샌드위치 향이 났다. 그곳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 쓰레기봉투가 쌓여있었고, 가끔  이른 아침 문을 열면 아직 식사를 해결하지 못한  생쥐가  쓰레기더미 안에서 툭 튀어나와  중국집 기름을 묻혀놓은 듯  검게  번질거리는 계단을 타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4층 공장직원  숙소에서 가장 어린 직원은 찹쌀도넛을 기름에  튀겼다. 도넛을  튀기는 것은  빵집에서 가장 초보가  하는 일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고자 학원비를  벌기 위해  제과점에  들어와서  이렇게  도넛이나  굽고 있다고 스스로 비아냥거렸다. 작은 키 작은 눈에 검은 안경테를 걸치고  기름에 둥둥 뜬  찹쌀 도넛을  하얀 부분이  아래로  내려가도록  뒤집으며 늘 뭔가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삶은 계란 한 양동이를 까느라  쪼글쪼글한 손이  되어버린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고르지 않은  치열을 가진   주방아줌마는 사내가 말이 많다고 흉을 보았다. 대부분 공장직원들이 말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고파 죽겠다며 징징대며 주방을 떠나지 않는 어린 공장직원에게 주방아줌마는 앞치마에 손을 쓱 닦고 말했다.

"내 아들 같아 주는 것이여!"

 육십이 다 되어 보이던 아줌마는 속 썩이는 아들 때문에 이 고생이라며 어린 공장직원에게 욕을 한 바가지 끼워 넣은 샌드위치를 쑥 내밀었다.


11시쯤  진한 쌍꺼풀,  눈썹 문신을 한  오십 대 초반의 주인이 막 사우나에서  빠져나온  맨 얼굴로 들어와 카운터에  앉아  화장을 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풀어진 얼굴을  정리하고 얼른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갑자기  행주를  들고  닦는 시늉을 했고,  공장직원들은  제빵실에서  좀 더  부산하게  움직였다.  

 소독업체를  부른 늦가을, 홀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공장직원 대부분이  월출산으로  야유회를 갔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다. 그날 저녁, 나는 난생처음으로  나이트클럽을  갔다.  박남정의 '널 그리며'에  맞춰  부공장장은  춤을  췄고, 그 춤은 박남정과 너무 똑같아서 아가씨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나이트에  익숙하지 않았던  제과점 식구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빙빙 도는 것으로 춤판을 마무리했었다.


케이크를 보며  아주  오래전 머물러있는  시간 속으로  다녀왔다. 그들도 아주 가끔 그 안에  다녀가지 않을까? 오른손으로  빙글빙글 돌려가며 쌓아가던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맛보고, 따뜻한 빵냄새를  맡거나, 주방 뒤쪽으로 나가 피우던  담대  한 모금과 하수구 속으로 쏙 들어가는  생쥐 꼬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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