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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Feb 18. 2024

째마리, 봄똥으로 피어라

"아, 며칠 만에 드는 햇볕이야!"

기지개를 쭈욱 켜고 나니  몸이  나른해졌어. 금세 졸음이 밀려오는 거야. 까무룩 잠이 들었지.

그때 빠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무거운  눈두덩이를 올려 게슴츠레 올려다보니  빨간 고무장갑이 내 옆에 살진 배추를 은빛 칼로 도려내고 있지 뭐야.

"째마리는 그대로 둬라!"

 마루 끝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텃밭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말했어.

물방울무늬 엉덩이는 하늘을 향한 채, 꽃무늬모자를 쓰고 빼꼼히 내놓은 검은 눈망울로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깜짝 놀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엄마, 요 시원찮은 놈은 그냥 두라고요?"

 다행히도 할머니의 딸인 모양이야.


 할머니는  늘 텃밭에서 맨손이었어. 마르고 버석한 곱은 손이었지. 고랑에서  올라오는  풍년대도  양판쟁이도 광대나물 쇠비름도 고랑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 손으로  뽑아냈어. 손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대신 입으로 소리를 냈지. 하나씩 뽑혀 나동그라질 때마다 '취! 취!' 소리가 났어. 어떤 날은  내 귀에  옹이가 박힐 것 같았어. 하지만 난 듣지 않을 방법이 없었어.


밤새 내 몸에 앉은 달빛이슬을 해님이 거둬가기 전, 할머니는 하루도 잊지 않고 텃밭으로  나왔어.

어느 늦가을, 그날도 할머니는 내 속을  파먹는 초록 벌레를  찾아 나를 뒤적거리며 말했어.

"울아버지는  내 머리를  참빛으로  곱게 빗어  기영머리를  따주었제. 근디  울어머니는  매웠어...

봄날  쑥 바구리에 숙지(쑥부쟁이)라도 섞어 뜯어오는  날에는  그 바구리를  그냥  마당에다  내동댕이 쳐부렀당게.  어머니는 숙지노물을  안 드셨거등. 낸중에 울애기들은  꼬랑에 가까운 논둑에서  숙지를  뜯어다가  데쳐갖고  참기름 허고  조선간장에  버무려주면  얼마나  잘 먹었는디  말이여. 우리  자슥들한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맹키로  잘했음시로  울어머니는 왜  나한테는 그랬는가  모르겄어... 세상살이가 하도 팍팍해서 그랬을...

아이고, 요놈 찾았다!"

갑자기 할머니의 이야기가  끊겼지 뭐야. 그때 내 아삭한 이파리 사이로  록 똥이  뎅구르르 굴러내렸어.  할머니는 재빠르게 내 몸 앞뒤를  뒤적이더니 고놈을  찾아 발로  으깨버렸지. 할머니  발밑에서  푸른똥을 싸는 녀석들이  무참하게  죽어갔지. 그 사이 우리들은 이파리 수를 늘리고 속을 채워 몸뚱이를 불려 나갔어.


그런데 째마리래!

똑같은 날 심어졌는데,  

옆친구는 속이 차서  제  살을  찌워  자꾸 내 옆으로  다가오는데 말이야. 


난 째마리래!  슬며시 화가 올라왔어. 그 말을 듣자 내 살은 더욱 뻣뻣해졌지. 살진 친구들은 보드라운 속살들을 더 채워가는데 말이야. 할머니가 실수한 거야. 내 귀는 열려있는데 말이야.   

김장하는 날, 할머니의 딸은 날 그냥 지나쳤어. 난 화가 났지만 나오던 콧김도 멈춘 채 죽은 듯이  납작하게  누워 있었어. 주변이  조용해지고 살며시  눈을 떴을 땐 그 많던  친구들이 다 뽑혀나가서  휑뎅그렁한   텃밭을  볼 수밖에  없었어.  

그런다행히  째마리는  나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나와  비슷한 친구들과  쪽파와 시금치도  마당 한 귀퉁이에 듬성듬성 겨울을 나고 있었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

눈도 내렸지.

어느 날은 싸락눈이 내렸어

또 어느 날은   어찌나  많은  함박눈이  내렸던지 난 콧구멍을  만들어 숨을  쉬어야 했어.


비가 내리고, 눈을  녹이고, 다시  찬바람이  불었어.

난 추위를 피하려고 용을  썼어. 뿌리에 힘을 주었더니 그 아래  땅이  날 꽉  붙잡아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어.

난 뿌리로부터  물을 길어 올려 단물을  만들기  시작했어. 내 몸이 얼지 않도록 말이야. 찬바람이 매서운 날에는 내 겉잎도 하얗게 변해갔어. 그럴 때마다 나는 땅에 몸을 맡긴 채 힘겹게 물을 길어 올렸지.

"끙차! "

쪽파와 시금치가  펌프질을 하는 소리도 들렸어.

나는 찬 바람을  피하기 위해 작은 몸을 다시 한번  납작 엎드렸어.


눈 오는 날, 할머니는 검정 테두리에  노랭이와 같은 색깔의 이  둘러진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왔어. 물론  지팡이를  짚고 말이야. 노랭이는  제집에서 납작 엎드려 앞발을  핥고 있다가  할머니를 보고  꼬리를  흔들고  눈을 밟으며 쫄랑거리지  뭐야.


"노랭아, 춥지야! 너는 여그 가만히 있어라. 내가 따순 국에 밥 줄팅게.

이라고  추운 날, 울 오라비는 산으로 가부렀단 말이다. 저쪽 지리산 골짜기서 사촌오래비가  봤다는디  다리를  다쳤드랴. 그람서  내가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고 울드랴. 그라고는 소식이 없었당게. 그것이  오래비가 시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아부렀어.

그라고  얼마 안 가서 아버지는  놈의 집 지붕 이어주다가  떨어져서  빙원한번  못 가보고  돌아가셨재.

아버지 오빠 모두  떠나버리고  어머니와 나만 남았당게.  

귀가 애려도 다리에서  고름이 나와도  빙원이 뭐여 기냥  버텼재. 피난살이 징헌 세월에도 독허게  버텼당게.

노랑아, 추운게  요것 깔아줄팅게  들어가  자그라잉"


할머니는  노랭이 집에  무릎덮개를 깔아주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  내 쪽을  바라봤어.

추위에  웅크리고  핼쑥한 얼굴을  보더니 그냥  집으로  들어갔어. 마당에는 노랭이가  쫄랑거리던  발자국과  할머니와 지팡이 발자국만 기우뚱하게 찍혀 있었어.


봄이 오고 있어!

할머니 장독대 옆, 고샅으로 나가는 길에  오래전부터 키 큰 납닥감나무가 있었어. 그 아래  나뭇가지들이  수북하게  쌓이기 시작했어. 까치가  새집을  짖고 있나 봐. 봄이 걸어오고  있다는 신호야!. 

그제야  몸을 툭툭 털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어.

옆에  어중되게 살진 녀석이 얼어버렸지 뭐야. 나처럼  온몸을  땅에  붙이고  바람을  피했어야 하는데... 그 녀석은  선채로  머리를 감싸고  온몸으로  겨울을  맞았었나 봐. 녀석의  몸뚱이가  너무 컸어. 서서히 하얗고  누렇게  변한 것을 난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나는 기지개를 켰어.

그리고 땅속에서 말랑한 물을  길어 올렸어.

그리고 봄볕을 온몸에 바르고 나는 새살을 피워냈어.

담장가에  조팝나무, 매화꽃도  깨어났는지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장독대 주변에 수선화도 깨어나는 모양이었어.  물론 쪽파도  시금치도  벌써  깨어났는지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렸어.


"요 나숭개  올라온 것 좀 보소!"

 겨우내  들여다보지 않던  할머니가  텃밭에  들어왔어.

"째마리가 달곰한 봄동이 되아부렀네!

 애려서 한쪽 귀가 먹고, 다리에  고름이 나오니 니가  살것냐 싶어 놔두고 피난을 갔더란다. 그런디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아직 살아있더라는 아가  나였단다.

못난 놈이  산을 지킨다고, 그런 내가  울어머니를 모셨제. 째마리가 말이여..."


할머니는  내게 하는 말인지  당신에게 하는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고랑에  올라온 냉이를 손때묻은  대바구니에  담으며 쉬지 않고 말했어.

"째마리가  요로코롬  꽃맹키로  이삐게  피어부렀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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