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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Mar 02. 2024

눈이 내리면, 풋사랑을 꺼내먹어요

아마 봄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던 삼월쯤이지 않았을까? 학교 가는 길, 징검다리를 건너  이웃마을 앞 정자나무도 지났다. 조금만  더 걸어 물레방앗간을  지나면 울퉁불퉁한 길을 벗어나  작로를 올라타게 된다.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학교 가는 길이  혼자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뒤가 신경 쓰였다.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길가  풀숲 쪽으로  비켜줘도  지나가지 않고  내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추는 게 느껴진다.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고개를  휙 돌려보았다. 1반 반장이었다.

"야, 이것 좀  받아봐라!"

자전거를  끌고 오던  그 아이의 손에 흰 편지봉투가  들려있었다. 엉겁결에  손을  내밀려다 다시  집어넣고  말았다.

"받아! 내가 꼭 전해주기로  했단 말이야!"

 아이 특유의  느리고 유들유들한 말투, 게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고 있었다. 금기의 물건이라도 되는 양  얼른 시선을  떼어내고 고개를 돌려 다시 걸었다.

"야, 받아! 그리고  답장해라. 난 전달했다!"

걸어가는 내손에  거의 떠밀듯 편지를  맡기고 그 아이는 다시 몇 번  발을  구르더니  날래게  전거 위로 올라타 페달을  밟았다.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까지 한다.  

"00 이가  너  좋아한대!"

뒤통수에서도  그 아이의 짓궂은 눈과 입이 보였다.


밤새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결국 보낸다는 그 편지  속 그 아이가 건넨 말,

'나는 너를 아낀다.'

부끄럼이 먼저 밀려왔다.


그 후 학교 화장실이나 동네 담장에서  우리들의 한글이나 영문 이니셜이과 함께 장난스럽게 괴발개발 흘린 낚서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둘이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날은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그 아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놀러 간 날이었다. 해 질 녘  아이들은  장난처럼 우리 둘을  남긴 채 마을 들어가는 길에 있던 제각 밖에서  대문을  잠가버렸다. 놀란 나는  뭐라 말도  없고  눈을 어느 곳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고, 그  아이도 놀라  얼른  문 열라고  소리 지르고  하다 끝나버렸다.


 친구를  대학 2학년  여름에 다시  만났다. 다음 날 있을 MT준비로 늦게서야 자취방에 들어온 저녁이었다. 자취방 주인이 나를  불렀다.

"학생 전화받아봐요! 아까부터 전화 왔었는데..."

우리 주인집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아리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번호였다. 놀라서 주인집 마루에  내놓은  다이얼전화기를 가까이 잡아당기자 얼굴이  살짝 얽은 주인아저씨는 부모님처럼 옆으로 다가와   수화기 속  남자를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남자던데..."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나야, ㅇㅇ이..."


다음 날, 우리는 간이터미널 부근 다방에서 마주 앉았다. 군복에 짧은 머리, 그는 다방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 느물거리는 차림의  군바리가 되어있었다. 나는  면티에  청바지, 학과 공부보다 2학생회관 동아리에 빠진 학생이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알았다.  

 거꾸로 매달아도 군바리 시계는 돌아간다고 말하는 그 남자와 뼈 빠지게 농사지어 대학 보내놓으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나 하고 돌아다니는 그 여자는 알았다. 그때 그 아이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그의  형으로부터 들었다.

"네가  엄청 변했다고 하더라!"

 그도  나만큼  그날  낯선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그날 내 머릿속에는 MT를  먼저 떠난  동아리 사람들 뒤를  빨리  뒤쫓아 갈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열다섯 아이가 어른의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만지작만지작거리다 어색하게 꺼내놓은 추자알 같은 말,

'나는 너를  아낀다.'

조용히 나려 하얗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문득, 풋내 나는 첫사랑을  먹어본다.


그리고 이제야 열다섯 살  밋밋한 날에 설렘과 러움과 볼 빨간 사춘기를  가져다준 그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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