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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24. 2021

9. 불행은 행운과 함께 온다




어쩐지 운이 너무 좋았다.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서 과분한 사람들과 행운이 찾아왔다. 가끔 어려움은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큰 사고 없이 평탄히 순례길 20일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흘러갈 줄 알았냐'는 듯, 자매와 헤어져 다시 혼자 걷기 시작한 첫날에 내게 베드버그(벼룩)를 선물했다. 억울했다. 길을 걷는 동안 풀숲에 앉지도 않았는데,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널러 나와서, 잠깐 알베르게 잔디밭에서 무릎을 구부린 것뿐인데 베드버그에 물릴 줄이야... 살짝 간지러운 것 같아도 '에이 설마' 하는 마음에 그냥 잠자리에 든 게 내 순례길을 모두 망칠 줄이야. 그날 밤부터, 잠들었다 싶으면 물어뜯기 시작하는 베드버그 덕에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순례길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베드버그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한번 옮으면 가진 물건은 물론이고 침대 매트리스까지 버려야 한다는 베드버그. 물렸다 치면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알베르게에서도 꺼림칙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아무리 준비성이 없어도, 그것만은 걸리지 않겠다고 벌레퇴치 스프레이에, 침대에 까는 비닐까지 챙겨 다녔는데. 길 위도 아니고, 침대도 아니고, 정원에서 그렇게 어이없게 옮을 줄이야. 베드버그도 베드버그지만 더 큰 문제는 알레르기였다. 물린 자리가 아니어도 온몸에 작은 수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밤에는 미친 듯이 가려웠고, 햇볕을 받으면 아팠다. 결국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옷을 뜨거운 물에 빨고, 모든 물건은 햇볕에 널어놓았는데도 밤이 되면 어디선가 숨어있다 나타나 물기 시작했다. 침낭도, 외투도 입지 못하고, 그나마 입으면 가렵지 않은 얇은 옷들만 걸치고 몸을 웅크리고는 잠을 청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베드버그에 물린 다음 날 도착한 숙소는 시설도 식사도 엉망이었고, 내가 가려움에 바를 수 있는 연고를 물어보자 숙소 관리자는 도움을 주는 대신 꺼림칙한 얼굴로 나를 멀리했다. 그게 최악인 줄 알았는데, 더 최악인 일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살짝 잠드는 기색만 보여도 물어대는 벌레에 잠에 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내던 새벽. 어디선가 핸드폰 불빛 하나가 비치더니 계속해서 부스럭 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지켜보았더니, 순례자들의 배낭을 뒤지는 듯했다.


모두가 잠든 밤, 깨어있는 건 나밖에 없는 듯했다. 그나마 내가 있는 곳은 2층 강당의 안쪽이었고, 다행히 나는 이층 침대의 위에 있었다. 아직 입구 쪽에 있던 도둑놈이 다가올 위험은 없었지만 공포에 몸이 굳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도, 그렇다고 나서서 뭘 하기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순례길 위에서 별 귀중품도 없는 순례자의 배낭을 뒤지다니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었다. 자리를 옮겨가며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배낭을 뒤지고 있는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백번을 고민하다 누운 상태에서 "야!!!!" 하고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만약에 그놈이 다가오면 소리를 질러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울 작정이었다. 그놈은 놀랐는지 멈칫하더니 핸드폰 불빛을 끄고 도망치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살금살금 돌아와 또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야!!!!!!!"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결국 그놈은 발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갔지만, 현관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숙소 내부에 있는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베드버그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서, 그날 밤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금까지 내가 좋은 사람들만 만났던 건 그저 운이 좋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다음날 아침이 밝고, 일어난 사람들이 수다를 떨면서 아침을 먹는데,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전날 어떤 일이 있었는 줄도 모르고,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하호호 평화로운 얼굴이라니. 나는 혼자 두려움에 떨며 한숨도 못 잤는데.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빨리 짐을 챙겨 숙소에서 나왔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정신은 없고 몸은 무거웠다. 물린 곳이 가려웠고, 알레르기 때문에 온 몸에 퍼진 수포엔 점차 진물이 차올라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걸을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베드버그에도, 사람에도 지쳤고, 길을 걸을 힘도 없었다. 숙소를 나선 지 한 시간 후, 버스를 타고 레온(Leon) 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때엔 처음부터 끝까지 걷지 않으면 '순수하게 순례길을 완주'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계속 길을 걸으려면 레온에 가서 병원에 가는 편이 나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지금 이 길을 포기하고 말 것 같았다. 그렇게 안도와 아쉬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레온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가며 창밖으로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보았다. 차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하루 이틀씩 걸려 한 걸음씩 최선을 다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너무 바보 같고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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