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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Jan 27. 2022

15. 곁에 없으면 그리운 사람




나는 '받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기만 하면 나는 그만큼 해주지 못한 게 먼저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다비데는 그런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벽을 허문 것도 아니고, 뛰어넘은 것도 아니고, '옷이 진짜 많으니까 옷을 빌려주겠다'면서 갑자기 샛길(?)을 찾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가 쳐놓은 벽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재밌다고 띄워주니 신이 나서 그간 묵혀둔 끼를 발산하느라 정신을 놓은 사이에 들어온 게 분명했다."이 선은 넘어오지 마!"라고 해놓고 사실은 넘어와 말 걸어주길 바라는 아이처럼 나도 그렇게 슬쩍 벽을 넘어 내 마음 안쪽으로 들어와 준 그가 싫지 않았다.


다비데는 생각도 행동도 늘 나보다 빨랐고, 그래서 내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내게 뭐가 필요할지를 알아챘다. 하루는 산티아고에 가져온 양말 중 하나에 구멍이 크게 나서 웃기다며 보여주었다. 거의 하루 걸러 신고, 걷고, 또 빨아서 신고하다 보니 구멍이 나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웃고 잊어버리고는 숙소에 도착에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잤다. 자다 눈을 떴을 땐 머리맡에 양말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나는 새 양말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에 그의 마음 씀이 더욱 놀라웠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나도 알지 못하는 내 필요를 파악하고 챙겨주는 사람을 나는 생에 처음 만났다. 처음 겪어보는 방식의 배려였기에 받기만 하기엔 마음이 무겁고 자시고 그런 걸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나랑 장난치며 놀 때는 영락없는 아이 같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성숙한 어른이었고, 그의 배려는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의 친절이 너무 따뜻하고, 익숙하게 스며들어 나는 이제 그저 '고맙다'며 그의 친절을 받기 시작했다.


재킷으로 시작해, 양말, 그다음엔 비가 온다며 챙겨준 방수 스키 바지와 두꺼운 후드티가 차례로 내게 입혀졌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그가 챙겨 줄 때면 나는 그때서야 '아 이게 필요한 거구나!' 깨닫고 그가 입으라는 것들을 잘 챙겨 입었다. 그렇게 입고 길을 걸으면 의상이 그날의 날씨에 딱 알맞았다. 나는 그의 준비성과 현명함에 감탄하며 그를 '판다에몽(판다+도라에몽)'이라고 찬양했다. 동시에 '미리 준비를 하면 고생을 덜한다'는 것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에게 상의, 하의, 양말까지 빌려주고도 그에겐 아직 옷이 충분했다. (물론 전보다 빨래를 자주 해야 했지만) 그가 나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의 친절을 미안한 마음 없이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옷들을 챙겨주고는 다시 돌려받는 법이 없었다. 그의 옷들은 어느새 내 가방 속에 절반을 차지했고, 나는 이제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 대신 '네가 옷이 너무 많아서 내가 대신 들어주는 거'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럼 그도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내가 기뻐하는 걸 보며 행복해했다.


내가 처음에 그를 두려워했다는 것도, 가까이 다가오는 게 부담스러워 거리를 두려고 애쓴 것도 이젠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나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함께 걸은 지 며칠이 지나고, 어느 날 숙소에서 낮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곁에 그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졌을 때 나는 이제 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전함에 서둘러 숙소를 나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닐 때 나는 이제 그가 내게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길가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있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꼈을 때 나는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해맑은 얼굴로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내게 자기 곁을 내어주었을 때, 나는 당신이 내게 좋아하는 사람 이상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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