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나 인상을 가지고 들어와 살면서 보고 느끼는 많은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지요.(원래 칼럼에선 미녀들의 수다였었는데 말이죠.. 하.. 세월이.. )
‘한국의 OOO, 이것이 놀랍다’
짧게건 길게건, 강렬하게 혹은 은은하게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왔던 환경과 교육, 관습과 인식과의 괴리를 한국사회를 통해 느끼게 되고 놀라움, 당황, 불쾌, 신기, 수긍, 부러움 등등의 감정을 표출하게 됩니다. 우리에겐 그저 <일상>이라는 너무나 당연하고 불편없이 넘어가던 일들이 이들의 한마디를 통해서 다시 재조명되고 돌이켜 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곤 하는 것들이 참 참신하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입니다.
외국인의 시각과 우리와의 시각에서의 차이와 같은 이 ‘다름’에 대한 존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한번쯤 주목해 보아야할 사항입니다.
새로운 환경이나 사회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적응을 시도합니다.
이 자연스러운 적응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동안의 고정관념이 깨지기도 하고, 절대적인 가치관과의 대립으로 한쪽의 문화를 ‘미개’ 혹은 ‘어처구니없는’ 라는 식으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입니다. 이 갈등의 정도가 심히 지나치게 되면 무리한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헐뜯거나 뜯어고치려는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역사적 적개심과 거부감은 일본의 대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인터넷 뉴스에 올랐을 당시 수많은 네티즌들이 ‘축하합니다’, ‘기쁘다’라는 식의 어이없는 댓글들을 올림으로서 양국간의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드배치로 인한 한중간의 국민정서들도 좋은 예일테구요.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 우리에겐 kkk로 잘 알려진 이 집단은 백인 우월주의, 반(反) 유대주의, 인종차별, 반 가톨릭, 기독교 근본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표방하는 비밀 결사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자들을 종종 테러, 폭력과 협박 등의 수단을 사용하며 위협해왔습니다. ISA라는 테러조직이 있는가 하면 그 ISA로 인해 모든 무슬림을 탄압하고 핍박하는것을 정당화시키려는 미국의 대통령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와는 <다르다>것을 견딜 수 없는 이러한 갈등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종교가 [다름]을 이유로 하루에 몇천명의 목숨이 폭탄과 총칼앞에서 스러지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멸시와 압박을 받습니다. 돈의 있고 없고의 [다름]은 어느새 행복의 척도가 되어 버리기 일쑤이고,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은 수십년을 [다르게] 살아온 서로에 대해서 낯설어 하고 그것을 뜯어 고치려 싸우게 됩니다.
남성은 여성의 특혜를 비난하고, 여성은 남성의 본능을 조롱합니다. 오른편에 치우친 사람들은 반대편의 사람들을 빨갱이라 부르며 좌측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편을 수구라고 힐난합니다. 나이많은 사람들은 어린사람들을 곱게만 커왔다고 무시하고 어린사람들은 나이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꼰대취급하죠.
다름에 대한 갈등의 해결책을 내려본다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다름과 우리의 다름. 나의 다름과 배우자의 다름. 이 다름이 설사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 틀림에 있어선 지적이 우선될 것이 아니라, 인정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틀림은 상대방의 지적에 의해서가 아닌, 본인 스스로 상대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의 ‘배려’에 의해서 조금씩 바로잡히게 됩니다. 지적과 싸움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 갈등이 해소될 리 없습니다. 한번 이제껏 애인과 배우자와의 싸움의 원인을 돌이켜 보세요. ‘잘못’이나 ‘틀림’이 그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보다 ‘다름’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오해와 억지주장으로 인해 대부분의 갈등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옆집의 누구 남편은 주말마다 가족끼리 놀러간다고 하더라~ 당신은 왜 그래?”
이 말이 나오게 되면 남편은 주말에 놀러간다 할지라도,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기에 의욕이 날 리 없습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놀아주지 않는 서운함의 표현’이란 것을 남편이 이해하기 전에도 말이지요.
절약이라는 재테크에서의 중요수단은 간혹 가정에 서로를 사치나 허영으로 깎아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설령 ‘절약을 잘해 재무목표를 달성했더라도’ 행복해지지 않는 원인이 되곤 합니다. 상대방에게 사치로 비하되어버린 자신의 기호에 대한 회복되지 않는 자존심이 [배려를 통한 인내]를 [상당히 불편한 각고의 시간]으로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다름에 대한 이해는 직장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인맥관리, 그 기초인 대화법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며,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져 나갈 즈음에서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가정구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사항 중 하나입니다.
투자에서도 이 다름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투자란 곧 흥망성쇠(興亡盛衰). ‘흐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달걀이론이나 엘리어트 파동이론 같은 것들은 재테크나 주식투자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거의 구구단과도 같은 기본 공식입니다. 결국 이것들이 말하는 것은 ‘흐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흐름은 곧 변화를 말하고, 변화란 당사자들에게 바로 [다름]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요새는 펀드가 너무 유행이라서 그냥 열심히 예적금을 통한 저축만 하고 있으면 왠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깔보는 것 같고, 혼자만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 펀드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금융상품에 대한 가치관이 성립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묻지마 투자’를 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참으로 많이 보게 됩니다. CMA를 적금처럼 쓰는 사람이나, 적금에서의 핵심포인트는 이자율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이 있죠.
누군가 주식투자를 통해 큰 손해를 보았거나, 잘못된 부동산 투기로 전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린 모습을 보면서 ‘욕심을 부리다 탈난거지, 쌤통이다’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정작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기나 다 자기 가정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노력한 부산물이었음에도 욕심을 부리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회풍토의 조성은 정작 자신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용납되면서도 제3자나 타인의 경우엔 심각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워 비판하곤 합니다.
땅 한평에 5천만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땅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두고 ‘빌어먹을 부동산 광풍’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나 부동산이 이렇게 오르지 않았다면 위 표와 같이 과거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물가를 해소할 수 있는 투자수단이 그 당시엔 전무했을 것이라는 게 오히려 정답입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과거의 ‘지나친 물가상승’이나 ‘무능했던 정권’을 욕하고 말 것입니다. 욕할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욕만 하면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보다는 그냥 그래도 그렇게 그 다름을 인정하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흐름을 탈줄 알아야 진정한 재테크이고 투자입니다.
변화에 대해 다르다고 비판하고, 힘들어졌다고 불평해봐야 소용없지요.
변화에 대한 현명한 적응, 다름에 대한 인정은 앞으로 투자를 비롯한 모든 생활에서의 기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름은 인정해야 하고 이해한 가운데 배려를 통해 스스로 같아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