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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프랑스3_ 파리를 이해하는 것은 위대한 일

ft. 파리, 에펠탑, 에투알 개선문

"파리를 이해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 헨리 밀러


"파리에서는 누구나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구경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장 콕토


"밤이면 몽마르트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 성당에 올라 파리를 바라보곤 했다. 그곳은 헛된 오아시스와 같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우주의 황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앞에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것은 너무나 황홀했고, 아무 쓸모도 없는 파리를 위한 울음이었다." - 시몬느 드 보바르

<MAGNUM IN PARIS; '매그넘 인 파리' 사진전_ 예술의 전당, 2020>


이 말들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프랑스와 파리는 '정말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나라와 도시 중 하나'라는 말에 공감하는 분들도 꽤 있을 듯.


파리라는 도시. 난 프랑스와 혈연 및 지연 등으로 크게 연관된 것도 없는데, 앞에서 프랑스에 대해 정리해 쓸 정도로 왜 이렇게 설렘이 생겼는지. 그걸 정의할 수 있는, 바로 지금 떠오른 한 단어로는 '낭만'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한 단어로 이 도시를 다 표현하기엔 부족하겠지만, 이 나라의 역사부터 현재까지 파악해가며 한 번 더 매력에 빠지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패션과 미식, 예술과 낭만이 있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관한 자료들을 더 뒤적이며 정리해 본다.


[PARIS; 파리에 대한 개괄적 정보]

1. 개요
 1) 프랑스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파리 데파르트망(Department)’의 면적은 교외를 포함하여 2,845㎢이며, 인구는 약 1,100만 명(2020)이다. 해발고도 45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랫동안 센 데파르트망의 수도였으나 1964년부터 파리만으로 독립 데파르트망이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경제·교통·학술·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2) 센강이 남동쪽에서 시가지로 들어와 생루이섬과 시테섬을 감싸면서 북쪽으로 크게 만곡을 이룬 다음 남서쪽을 거쳐 시외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뱅센 숲(Bois de Vincennes), 서쪽으로는 불로뉴(Boulogne) 삼림공원이 이어진다. 센강의 남쪽을 ‘리브고슈(Rive Gauche, 左岸)’, 북쪽의 보다 넓은 지역을 ‘리브드루아트(Rive Droite, 右岸)’라고 부르며, 시 주변에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연상시키는 언덕이 줄지어 솟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리 [Pari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 기원과 역사(내용이 기니 바로 3. 기후로 스크롤을 내리셔도 좋음)
 1) 기원
파리라는 이름은 고대에 이 지역에 살았던 갈리아의 일족 파리시(Parisii)에서 나왔다. 역시 여기서 유래한 이탈리아어로 파리를 파리지(Parigi)라고 부른다. 파리시족은 주로 센 강의 하중도인 시테(Cité) 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테는 라틴어 'civitas'에서 왔으며, 도시를 뜻하는 '시티(city)'의 어원이다. 이때 고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파리시 족이 살던 곳에 도시를 건설한 것이 오늘날 파리의 기원이다.

 2) 역사
로마 제국 당시 루테시아는 시테 섬에서 시작해 센 강의 좌안 지역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나가며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파리 제5구역에는 루테시아 시절에 세워진 원형극장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졌고, 결국 센 강의 좌안 지역을 포기하고 시테 섬을 요새화하게 되어 그 후 파리는 상당 기간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요새도시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루테시아'라는 이름이 빠지고 '파리'라는 명칭으로만 불리기 시작했다.

5세기 말, 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점령했고 508년, 파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절엔 아헨이 수도가 되었다. 885년에서 886년까지 파리에 바이킹 족이 쳐들어왔는데 이때 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독일어로는 카를 3세)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바이킹과 강화를 맺어서 무마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 대신 파리 백작을 더 따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센강의 우안 쪽으로 파리가 확장되었다.

989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리프 2세 때에는 파리를 둘러싸는 성벽이 완성되어 파리는 강력한 요새 도시가 되었다. 11세기에 파리 대주교좌 부속 학교로 시작한 파리 대학교가 발전하여 스콜라 신학의 중심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독특하게 센 강 좌안은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발전했다. 대표적인 대학 지역으로 꺄르띠에 라땅이 있다. 센 강 우안은 시장이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대체적인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오를레앙파와 브르고뉴파의 치열한 혈전으로 파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후에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브르고뉴 측이 파리를 점령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가 붙잡혀서 마녀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를 처형한 건 잉글랜드군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었다. 그러한 탓에 오늘날 파리에는 커다란 잔 다르크 동상이 세워졌다. 파리 시민들의 잔 다르크에 대한 속죄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군이 파리를 다시 탈환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발루아 왕조의 왕들은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아르 강 유역(Val de Loire)에 세운 성을 더 좋아해서 파리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일례로 샤를 8세는 루아르 강 유역의 앙부아즈에서 태어나서 앙부아즈에서 죽었으며,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서 말년을 보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파리가 아닌 루아르 강 유역에 머물렀던 것이다.

위그노 전쟁 당시에 파리는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해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이후 등극한 앙리 4세는 파리를 프랑스 왕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부활시켰고 이후 파리에는 튈리르 궁, 루브르 궁, 폐병원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그러나 루이 14세 때 사실상의 행정수도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파리 시민들의 불만거리였고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왕가에 내건 조건 중 하나(3번 조건)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환도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중요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으며 파리에서 혁명이 과격해진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정치적으론 잇달아 일어난 혁명과 파리 코뮌 등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37년에 파리와 생 제르망 안 레이 사이에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에서 각처로 철도 노선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파리를 근대 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당시 센 현의 지사였던 조르주 오스만 남작(Georges-Eugène Haussmann). 조르주 외젠 오스만. 한국어 철자가 같아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이 있나 오해할 수도 있으나 프랑스어로는 'H'가 묵음이라 한글 철자만 같을 분 관계 없다. 이 사람은 중세 이래 이어져 온 좁은 골목을 넓은 불바르들(Boulevard)로 바군다. 불바르들은 가로수가 놓인 넓은 도로를 지칭하는 단어로 오스만 남작의 개조 사업을 논할때 꼭 등장하는 단어이다. 오스만 남작은 파리에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도심부를 재개발하고 사회기반시설들을 갖추는 파리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조르주 오스만에 의해 갖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전하면서 파리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제2제정이 붕괴하고 제3공화정이 탄생했지만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포위로 70여 일이 넘게 고립된 끝에 제3공화정의 보수파 정권은 프로이센에게 항복하게 된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에 저항하여 파리 코뮌을 결성하여 봉기하였지만 결국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이때 코뮈니스트들의 의도적인 방화로 튀를리 궁전, 서청, 정부, 법원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전까지 파리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차례의 엑스포가 개최되었는데 1889 파리 엑스포를 기념하여 에펠 탑이 건설되었고, 1900 파리 엑스포에는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으로 파리는 함락 일보직전까지 놓였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해 파리는 간신히 함락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파리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서 예술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 당시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들은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는 개전 1개월 만에 별 저항없이 독일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상젤리제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시민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겪었던 수모를 또 겪게 되어서 참담했다고 한다.(자료화면 중에는 울면서 독일군에게 손을 흔드는 파리 시민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 있다) 파리 시민들 중에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8월 15일에 파리는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파리가 함락당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대장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들이 설치되어 콜티츠가 히틀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파리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콜티츠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히틀러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이 때, 콜티츠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당시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Brennt Paris? /Is Paris Burning?)"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Paris Brule-t-il?' 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제목이 되었으며 게임 코만도스 2의 마지막 미션 제목도 'Is Paris Burning?'다.

명령을 무시하고 항복한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이 적어도 그들을 지키면서 안전을 보장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롤 탕기에게 항복 조건으로 자신과 17,000명 파리 주둔 독일군 목숨을 보장했기 때문. 물론 롤 탕기는 나중에 회고하길, "파리를 지켜준 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설령 그런 조건이 없었다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쟁포로로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풀려나게 되었고 파리 시를 무사하게 놔둔 것에 대한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콜티츠는 1956년에 파리를 조용히 방문했는데 바로 나치 독일군 지휘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호텔 르 뫼리스’를 잠깐 들러갔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콜티츠는 아주 단정한 자세로, 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조금은 놀란 듯한 눈치로 호텔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호텔 매니저가 콜티츠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콜티츠는 사양한 채 몇 분을 둘러보다 호텔을 떠났다.

콜티츠가 1966년 숨을 거두자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콜티츠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2014년 7월 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Extreme Surprise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헌데 콜티츠에 대한 비난이 있다. 전쟁 와중에 학살 및 전쟁범죄에 관여한 인물이건만 파리 시를 히틀러 명령을 씹고 놔뒀다는 이유로 칭송할 건 없다는 것. 하지만 워낙에 이 공로가 커서 그의 죄가 덮어지고 말았다.

전후에 파리는 교외로 확장되어 원래부터 많은 인구를 가졌지만 계속 인구가 증가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의 68운동은 파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패션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3. 기후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며 낭만의 상징 같은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날씨 좋은 남부에 사는 프랑스인 중에는 파리를 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이는 파리가 북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전체적인 기후가 남프랑스에 비해 훨씬 칙칙한 편이기 때문. 영국 런던처럼 전형적인 서유럽의 기후를 보여준다. 여름에는 쾌적하나 겨울에는 런던처럼 안개가 짙게 끼고 음울한 풍경을 보여준다.

파리의 1월 평균 기온은 4.9°C, 최난월 7월 평균 기온은 20.5°C로 연교차가 작아서 겨울은 부산보다 따뜻하고 중국 항저우시와 비슷하며 여름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강원도 대관령과 비슷한 시원한 날씨로 살기 좋은 기후에 속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637.4mm이지만 계절 상관없이 비가 고르게 오며, 1월 평균습도가 83%에 달한다.

4. 행정구역(읽어볼만 함)
20개의 구와 주변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흔히 "파리"라고 부르는 지역은 외곽순환고속도로 안쪽의 20개 구(아홍디스멍)를 말한다. 우편번호가 750(00)이면 파리 시내이다. 1구는 75001, 10구는 75010 등 시내 인구는 217만여 명, 외곽까지 합하면 1184만 명에 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행정개편에서 파리는 센 현의 현청소재지로 제1코뮌에 해당했고 시의 영역은 오늘날처럼 크지는 않아 파리 지하철 2호선, 6호선의 안쪽이 당시의 시 영역에 해당했다.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1860년 시 영역 확대시행(시 옆에 있는 공원 두 개를 파리시로 편입) 때였다. 이후 1968년에 센 현을 폐지해 파리시는 현과 동격의 자치단체로 규정되었다가 1978년에 프랑스를 각각 레지옹(지역권)으로 나누면서 파리는 일 드 프랑스 레지옹의 수도로 속하게 되었다.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서울특별시'이기보다는 '경기도 서울시'와 같은 식이다. 20개 구는 파리를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배치되어있다. 대체적으로 센 강 서안(강 남쪽 지역)이 조용하고 안전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최중심부와 북동쪽은 막장을 달린다고 평가받는다.

베를린(1920년), 도쿄(1932년), 서울(1963년), 런던(1965년) 등이 20세기 들어서 수도 행정구역의 대규모 확장을 단행한 반면에 파리는 19세기에 획정된 시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를 서울에 비유하자면 사대문 안과 성저십리(그것도 구한말이 아닌 조선초기 기준), 광주시, 과천시, 시흥시, 고양시, 김포시 등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프랑스의 행정구역 체계에서, 레지옹(région)은 광역자치단체로서 한국의 도에 해당되고, 데파르트망(départements)은 한국의 특정시에 해당된다. 아롱디스망(arrondissements), 캉통(canton)은 일반시 내지는 읍/면/구, 코뮌(commune)은 프랑스 내의 최소 행정 단위로 보통 시를 의미한다. 파리, 리옹 같은 구(아롱디스망)가 있는 도시를 제외하고는 최소 행정 단위는 시이다. 대한민국처럼 동이나 읍, 면이 없다. 파리에도 동이 없다. 파리의 최소 행정 단위는 구(아롱디스망)이고 다른 지역의 시와 비슷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설명은 이렇게 했지만 단순히 대한민국의 행정구역과 비교하기 어렵다. 파리만 하더라도 하나의 Département 이면서 하나의 Commune이다. 그리고 파리나 리옹이나 마르세유 같은 대도시에 있는 arrondissement은 다른 도시와 비슷한 위치이다.

파리가 이렇게 행정구역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좌파 성향의 코뮌들과 우파 성향의 코뮌들 간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출처: 브리태니커 대백과) 이러한 도시행정체계 때문인지 브리태니커 대백과에 따르면 광역행정 상의 문제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래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파리시의 외곽도시들을 편입하여 큰 도시를 형성하는 '그랑파리(grand paris)' 계획을 발표했고, 현재 외곽도시에서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지하철 15호선 등이 건설 중이며, 도시들은 정비사업 및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하지만 파리 대확장 계획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다. 파리 추가 확장 후 조직 개편을 염려하는 게드프랑스 레지옹 정부 소속 공무원들의 반발(한국으로 치자면, 도의 일부를 특별시나 광역시에 할양하는 것을 원치 않는 도청의 속내에 비유될 수 있음)과 파리 추가 확장을 원치 않는 파리시내 주민들의 반발 등.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단행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2020년 7월 11일, 파리 1~4구가 파리 중앙구(프랑스어로는 Paris Centre)라는 이름으로 행정상 통합되었다. 굳이 행정상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구청장이나 구청사 등의 행정적인 부분들만 통합되었고, 명칭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5. 교육(대학(Université) - 평준화가 특징
원래 1150년경 세워진 파리 대학교 및 1257년경 파리 대학교의 칼리지로 세워진 콜레주 드 소르본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지만 68혁명 때 파리 제1~13대학교라는 이름의 13개의 대학으로 쪼개지고 대학 평준화되었다. 이 중 파리 제4대학교와 파리 제6대학교가 2017년에 소르본 대학교로, 파리 제5대학교와 파리 제7대학교가 2019년에 새로운 파리 대학교로 통합되어 현재는 11개의 국립대학이 위치해 있다.
<파리(프랑스) - 나무위키>


[파리 관광위주 정보]

1. 구별 개요 

2. 주요 명소들 

3. 교통 

4. 치안(절대적으로 항상 주의. 필독!)

<파리(프랑스) - 나무위키>


[그 외의 파리, 프랑스 정보들] ft. 파리 신드롬
1. 파리 현지인들은 파리를 '빠히'와 비슷하게 발음한다. 그래서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들은 파리가 아니라 빠히라고 불러달라는 이들도 있다. 영어로는 '패리스'라고 한다.

2. 파리인을 지칭하는 파리지앵이라는 말이 제법 자주 쓰인다. 비슷하게 자주 쓰이는 뉴요커가 세련된 직장인 느낌 비슷하다면 파리지앵은 선진적인 예술인, 문화인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한편, 지방에서 파리지앵이라고 하면 왕재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고. 파리지앵은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3. 도시 전체적으로 위생 상태가 매우 개판이다.

4. 몽마르트르 언덕이 두 개가 있기 때문에 말을 잘못하면 엉뚱한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갈 수 있으니 조심. 야경 본다고 절대 밤에 가지 마라. 신변을 보장하지 못한다. 18-19구는 오후 6시 이후엔 파리에 익숙하지 않은 관광객이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해가 길든 짧든 시간대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위험 할 수 있는 곳이다. 파렴치한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도보로 몽마르트르를 올라가는 것보다 몽마르트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5. 파리의 건물들은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건물 내부 리모델링은 자유롭지만 외부 리모델링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는 이제는 아예 쓰지 않는 굴뚝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고 있다. 이는 파리의 모습을 후손에게까지 온전히 남겨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에서 이 파리 시내를 부수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이런 특징 때문에 파리지앵들은 도시를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다룬다는 비웃음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하자. 즉, 사람이 사는 도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곧 도시의 발전이자 변화인데 '지금 이 순간의' 형태에 극단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포기해버렸다는 것. 이런 입장에서 보는 사람들은 파리는 사실상 현대 도시라기보다는 벨 에포크 시대의 도시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6.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경향이 강하다. 단적으로 체코의 프라하 같은 경우는 공산정권 시절을 거치며 실제로도 발전이 정체된 점을 감안해도 구시가지 경관에 대한 집착이 파리보다 훨씬 더 심하다.

단적으로 유럽에서 몇 안 되는 현대식 도시들인 프랑크푸르트, 로테르담, 바르샤바는 모두 2차대전 당시 송두리째 박살난 곳들이다. 하지만 이 조차도 도시경관을 현대식으로 만든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도시구역을 빠르면 2차대전 종전 후 늦어도 냉전 종료 후에 전쟁 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편이다. 시간에 따라서 도시경관이 지나치게 변하는 아시아, 북미권 대도시와는 달리 좀 낙후된 느낌이 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보면 옛 것을 보존하며 그 개성을 지킨다고 볼 수 있다. 그냥 유럽에서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이 타 문화권과는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서울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반되는 도시라고 볼 수 있다.

7. 도시의 유명세만큼 사람들은 몰리고 도시와 건물은 확장되어야 하는데, 위의 이유들과 함께 지반의 특성상 옛 건물들을 유지 중이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의 지반이 그다지 단단한 땅이 되지 못하다고 한다. 늪지 위에 지어진 도시라 건물을 새로 높게 올리고 싶어도 골치가 아픈지라, 인구는 늘어나고 집은 한정되어 있고, 집값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파리 월세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 그 덕분에 유럽에선 런던과 함께 주택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도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매매가격은 서울과 큰 차이가 없다.

8. 프랑스 저작권법은 '파노라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 지적재산권법 122조 5항에 근거한다.(링크). 그러므로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퐁피두 센터처럼 저작권자가 생존해 있거나 사망 후 70년을 채우지 못한 건축물과 공공전시물의 촬영 및 상업적 이용은 엄격히 제한된다.

9. 혁명기념일마다 파리에서 열병식을 비롯한 큰 축제를 벌인다. 개선문 쪽에서 온갖 전투기와 군 수송기들이 곡예비행을 벌이며 팡테온에서는 군악대 연주 공연이나 프랑스군 전투 차량 체험 행사도 벌인다.(2014년 기준) 밤에는 에펠탑 아래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며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불꽃놀이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밤에 하는 행사는 당연지사 방송으로 나간다. 더욱이 2014년은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이라 더더욱 크게 연 것으로 보인다.

10. 한국의 수도권 집중 문제 못지않게 프랑스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 집중보단 훨씬 덜 한 편이다. 단순 인구만 봐도 파리 권역은 프랑스 인구의 1/6이 거주하지만 한국의 수도권은 인구 절반이 거주한다. 파리나 리옹이나 마르세유나 정말 지방 시골 도시가 아닌 이상은 생활하는 환경이나 접하는 게 비슷하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사실 프랑스만큼 수도에 많은 기능과 인구가 집중된 국가가 별로 없다. 표준어같이 중앙집권적 행태가 서유럽에서 제일 강하다. 그리고 파리 인구 집중이 생각보다 심하진 않지만 일드프랑스권을 제외한 다른 광역도시권이 크게 발달하지 않고 지방 전역에 인구가 고루 분포된 편에 가까워 수도권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한국보다 어찌 보면 더 큰 면도 존재한다.

11. 매년 여름 7~8월경, 파리해변 이라는 뜻의 파리플라쥬 Paris plage라는 볼거리가 생긴다. 센 강을 중심으로 인공 해변을 만든다. 지방 도시에서 백사장 모래를 가져와 미쳐 바캉스를 가지 못한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해변 느낌을 선사하고, 반대로 파리의 예술품들을 지방 도시에 보내 볼거리를 제공한다.

12.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發 오해 중 하나가 '프랑스인은 자국 문화 자부심이 높아서 영어를 사용하면 무시하고 지나간다?'인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애초에 이원복 교수 본인부터가 만화에서 저 편견이 오해라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젊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회화는 할 줄 알기 때문에, 영어로 물어본다고 문전박대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옆 동네 영국 말이다 보니 평균적 수준으로 보면 한국 사람 영어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역시 나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 영어도 못한다고 봐야 한다.

특히 불어 지명을 영어 독음으로 읽으면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길을 물어보려면 어설픈 영어보다는 지도나 정류장명이 나온 사진을 들이미는 게 낫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영어 학습자가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영어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늘어서 어설픈 불어로 질문하면 거만한 표정과 함께 어설픈 영어로 답해주는 경우 역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3. 19세기 때부터 망명온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유명했다. 정치가, 사상가, 작가, 심지어 구 왕족 등등 신분에 따라 다양했는데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 호치민 등등 매우 많다. 1979년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터키, 이라크 등을 떠돈 끝에 몇 개월 정도 파리에 머물다가 이란에서 혁명이 터지자 귀국한 바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71년 건축가 김중업이 서울의 도시계획 및 건축에 관한 정부시책을 비판한 일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찍혀 추방된 적이 있었는데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설계한 공으로 프랑스로부터 받은 훈장으로 인해 파리로 망명할 수 있었다. 1979년 홍세화 씨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자 파리로 망명하여 20여 년간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가 지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그의 생애와 파리에서의 생활을 담은 책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유로 망명을 떠난 이예다는 그의 난민심사 기간에 파리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14. 위와 같은 이유로 파리는 '테러의 도시'란 오명도 따라다닌다. 종교나 사상이 다른 망명객들끼리 총알과 폭탄 주고받는 일이 1970~80년대에도 빈번했다. 2015년 11월 13일, 무장괴한들에 의한 테러로 백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5. 2017년 7월에 LA와 삼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파리가 2024년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어, 1924년에 치러진 대회에 이어 무려 100년 만에 하계올림픽을 다시 열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개최된다면 영국의 런던의 뒤를 이어서 파리는 올림픽을 세 번 치르는 두 번째 도시가 된다. 원래 2012년 올림픽을 두고 영국의 런던과 경쟁을 했으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결정적인 실언으로 인해 결국 런던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16. 2018년 12월, 마크롱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7. 파리 시내에서는 노상방뇨로 거리에 오물이 많아 지저분하니 조심하는 게 좋다. 일단 노숙자를 생각하겠지만 범인은 노숙자뿐만이 아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이나 잘 갖춰 입은 샐러리맨 혹은 노신사들은 설마 그러지 않겠지만, 화장실이 사실상 유료인 파리 특성상 낮에는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밤에는 아무 데서나 노상방뇨하는 사람들은 정말 흔하다. 길거리나 역 근처에 유료화장실이 있긴 한데 그 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쇼핑몰 화장실인데 유료인 곳조차 있을 정도. 유료 화장실이 1~2유로인데 이게 유료 맞나 싶을 만큼 끔찍하게 더럽고 관리가 안 된다는 걸 감안하면 그냥 돈 조금 더 주고 커피 한 잔 시킨 후 화장실 쓰는 게 낫다 보니 결국 사실상 유료 화장실. 참고로 이건 관광객 뿐만이 아니라 애초 파리지앵이 사는 방식이다.

18. 전술한 파리에 대한 환상과 그에 대비되는 현실 때문에 '파리 신드롬'이란 말도 생겨났다. 물론 더 정확하게는 파리 역시 그냥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일 뿐인데 자기 지역에 대한 불만이 다른 지역에 대한 일종의 환상으로 투영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결국 어느 지역이든 각각의 장단점은 있기 마련.
<파리(프랑스) - 나무위키>


정리한 이 내용들 정도로 파리를 이해하려는 노력만 해도, 우린 이미 위대한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를 여행했던 이 땐 시내 관광은 삼일 정도만, 그것도 느긋하게 했다. 그래선지 유명 관광지 자체의 사진은 많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적어가는 내가 다시, 그리고 독자분들이 파리를 가게 되실 때는 아마 더 많은 파리에 대한 환상과 정보를 토대로 여행을 하시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 여행이란, 떠나게 될 설렘으로 그려보고 기대하는 게 아니던가.




그날도 숙소에서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 느긋하게 무작정 에펠탑을 보기 위해 나갔다.

가까운 역에 내려보니, 보였다. 에펠탑이!!

에펠탑 인근에 지하철역이 두세 곳(6호선 비라켐, 8호선 에콜 밀리테르, 사진 상의 RER C선 샹 드 마르스-투르 에펠역) 있던 거로 기억한다. 파리 시내 지하철 정거 장당 거리는 1분 이내로 서울 등에 비해 꽤 짧은 편.


파리시 자체는 세계적인 도시들인 뉴욕, 서울, 도쿄 등에 비해 꽤나 작다. 시 면적이 105.4㎢로 서울시(605.2㎢)의 1/6 이하라고 들었던 기억이 나며, 특히 시내는 좁은 관광 몇 특구에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이 조밀 조밀하게 있다. 그래서 걸어서 관광하기엔 더욱 좋다.


기념품 판매상이 우산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로 당시 35도에 육박했던 8월 중하순 파리의 온도

지금 생각해 보니 8월의 서유럽은 해는 길어 관광할 시간은 많았지만, 30~35도에 육박하는 날씨로 너무 더웠던 거 같다. 그래서 유럽의 최적 여행 시기는 난 봄이나 가을을 추천한다. 그래도 여름에 유럽여행을 가야 한다면 야외에서 관람할 것들은 되도록 너무 더운 시간을 피해 오전 일찍, 저녁 이후로 권한다. 대신 너무 더운 한낮의 시간에는 낮잠 혹은 시원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방법이다. 실제로 몇 년 뒤 두바이에 갔을 땐, 그렇게 했더니 효율이 좋았으며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파리의 행정구역 구분 <나무위키>. 에펠탑은 7구 인근


Je vais être jaloux de cette Tour. Elle est plus célèbre que moi.
저는 저 탑을 질투해야겠군요. 저 탑은 저보다 더 유명합니다.
- 귀스타브 에펠(에펠 탑 설계자)


[에펠 탑; La tour Eiffel(프랑스어), Eiffel Tower(영어)]
* 주요 내용으론 개요, 관광 쪽만 봐도 좋다.
1. 개요
1889년 3월 31일 준공. 프랑스의 건축가 알렉상드르 구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이 만든 거대한 철탑.

전 세계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근대 건축의 혁신점 중 하나로, 1889년에 300m라는 경이적인 높이를 달성하여 1930년까지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건축 높이 300m에 훗날 추가된 안테나 30m를 더해 전체 높이 330m이다.

2. 역사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 패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1889 파리 엑스포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특히 영국이 자랑하는 최신 건물이었던 수정궁과 세인트 판크라스역을 의식하여 기둥 간의 거리를 115m로 늘린 기계관(판크라스 역은 73m)과 300m 높이의 에펠 탑을 선보였으며, 일종의 기술을 과시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원래는 20년간 설치했다가 해체할 예정이었다. 사실 건축적인 의의는 기계관이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대중이 느끼는 시각적인 충격은 에펠 탑이 더 뛰어났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엔 에펠 탑만이 살아남았다.

마천루가 즐비한 오늘날에는 잘 느끼기 어렵지만, 약 169m의 구조물인 워싱턴 기념탑, 161m의 건축물인 울름 대성당이 가장 높던 시절에 등장한 300m의 타워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인간의 구조물의 고도가 '갑자기' 올라간 적이 없었다. 특히 철을 가지고도 고전적 건물을 모방하기 바빴던 시대에 철골을 당당하게 드러낸 에펠 탑의 위용은 마치 새로운 신 건축의 시대를 선언하는 듯하였으며, 이는 에펠같이 토목 분야에서 활동하던 구조 공학자들이 일반적인 건축가보다 산업시대의 새로운 재료들을 더 빠르게 활용했기에 가능했던 진보다.

3. 평가
자유의 여신상과 더불어 에펠의 양대 걸작으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은 건물이다. 대표적으로 "저거 무너지면 사람 다 죽는다"라는 일반인들의 공포, 그리고 "뼈대만 앙상한 저딴 건물이 파리에 있는 걸 참을 수 없다!"라는 예술가들의 항의가 있었다. 덤으로 "비쩍 마른 피라미드"라는 혹평과, "예술의 도시인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흉물"이란 소리도 들었다.

실제로 파리에 가서 보면 흉물이란 소리가 나온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다른 건물과 이질적인 분위기이다. 주변 건물은 모두 육중한 석조 건물 양식인데, 에펠 탑은 선으로 이루어진 철탑이니. 그럼에도 파리의 스카이라인이 낮은 편이라 도심 주변이라면 에펠 탑을 보기가 쉽다.

이게 건설되기 시작하자 꼴도 보기 싫다며 정말로 파리를 떠난 예술가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문호 기 드 모파상이었는데, 파리의 풍경을 해친다며 건설을 반대했으며, 얼마나 싫어했는지 에펠 탑이 안 보이는 방향으로 창을 낸 집에서 살 정도였고, 누군가 에펠 탑에 있는 음식점에서 자주 식사를 하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모파상 왈, "파리에서 에펠 탑이 안 보이는 장소는 이 곳 뿐일세."라고 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다만, 진위여부가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이후 에펠 탑 근처의 몽소 공원에 세워진 모파상의 동상도 에펠 탑과 등을 돌린 방향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에펠 탑을 파리의 흉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당시 시대 자체가 석조 건축에서 철과 유리, 콘크리트 건축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당대의 파리는 석조 건물들만 즐비한 도시였으며 그 중에 홀로 이질적인 에펠 탑은 충분히 혹평 받을만 했던 것. 시간이 지나 기차역 등 많은 거대 시설들이 에펠 탑과 같은 철골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지고 나서는 그럭저럭 도시 미관에 녹아 들어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파리의 야경은 간접 조명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아름답고 운치있게 보인다. 에펠 탑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일정 시간(매 시각 정시, 동절기 기준 자정까지)이 되면 에펠 탑에 장식된 수많은 전구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트리에 붙은 그 전구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느낌. 이것을 보면 다들 감탄을 하곤 한다. 예전엔 10분 정도 불빛이 반짝였는데, 지금은 줄어들어서 5분 정도 반짝거리곤 꺼진다. 조명 시설 자체에 저작권이 걸려 있어서 촬영이 제한된다.

에펠은 자신보다 더 유명해져서 질투한다고 했지만 토머스 에디슨도 이걸 보고 신의 기술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의 건축물. 참고로 토머스 에디슨은 에펠 탑에 설치될 엘리베이터를 설계했다. 겨우 20년간 쓰고 해체할 건물을 짓기 위해 수천 장의 도안을 만들 만큼 정성을 쏟았는데 이후의 기준으로 보아도 수준급이라고.

4. 구조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는 옛날의 유압식 엘리베이터.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옆을 보면 거대한 통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3층으로 가는 것은 현대식이다.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가 2층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펠 탑을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1층 전망대 아래 부분(아치 위)에 탑의 4면을 따라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공학자 및 수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 면에 18명씩 총 72명이 새겨져 있으며, 이공계 학생들이라면 수업중 한번씩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학자들의 이름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어 프랑스 학문사의 위엄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다.

명단은 에펠 본인이 직접 선정하였으며, 이러한 이름을 새긴 이유는 예술가들이 에펠 탑 건설에 반대하는 것을 우려하여 '과학에 대한 관심 촉구'의 의미에서 작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에펠 탑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니... 각인된 이름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20세기 초반에 페인트로 덮었다가 87년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참고로 에펠 탑 안쪽에도 식당이 있다. 2층에 위치해있다고.

5. 관광
에펠 탑 자체는 정말 볼 것 없는 곳이지만 파리 시내는 작은데 관광지는 넘쳐나다 보니 다른 명소를 다니다 보면 에펠 탑은 반드시 이동 경로 상에 위치하게 된다.

에펠 탑을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로,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엘리베이터 쪽은 요금이 비싼 편이다. 그렇다고 계단 입장은 무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28유로, 한화로 약 34000원이다. 파리 주요 명소와 박물관을 무료입장 혹은 할인 입장할 수 있게 해 주는 "파리 뮤지엄 패스"도 에펠 탑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에펠 탑을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만 보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에펠 탑이 위치한 마르스 광장 자체도 상당히 아름답다. 맞은 편의 샤요 궁(Palais de Chaillot)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다. 마르스 광장 바로 앞에는 중국어, 한국어, 아랍어로 적혀진 '평화'가 반복되어 있는 유리벽이 세워져 있다. 마르스 광장에 왜 "평화"가 반복되어 있는 유리벽이 세워졌냐면... 프랑스 침공에 따라 아돌프 히틀러가 마르스 광장을 밟는 아래의 사진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굴욕이 나온 곳이다.

에펠 탑 앞의 마르스 광장에서는 1937 파리 엑스포가 개최되었다. 이미 1937년부터 독소전쟁은 예정되었다고 할 정도로 나치 독일과 소련의 자존심 대결로 치러질 정도의 장소였다. 결국 마르스 광장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의할 점은 지상에는 보따리 상인, 탑 위에는 소매치기가 출몰한다는 것. 원래 유럽 쪽이 소매치기가 많은 동네지만, 에펠 탑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야 하는데, 소매치기들도 다 돈 내고 줄 서서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엘리베이터 같은 곳을 보면 '소매치기 주의(BEWARE OF PICKPOCKETS)'라는 문구와 함께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소매치기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어떤 투어 가이드는 일행 중 한 명의 주머니에 손까지 넣고 있는 소매치기를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에펠 탑 아래 그 주변에서는 야광 장난감과 온갖 크기의 에펠 탑 모형을 파는 잡상인들이 어슬렁거리며 모형을 짤랑짤랑거리며 "원 유로!"라며 외쳐댄다. 세시간 정도 엘리베이터를 타러 줄을 서면서 호객 행위를 보면 기분이… 야바위꾼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판돈은 50유로. 주변에 따가는 척 하는 바람잡이가 최소 3명은 되니 절대 시도하지 말 것. 단속이 뜨면 역할을 나눠 순식간에 거둬서 사라진다.

위의 기 드 모파상 일화에도 나오듯 에펠 탑에 올라가면 정작 파리 스카이라인의 핵심인 에펠 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파리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싶으면 차라리 다른 전망대에 올라가라는 평도 있다. 예를 들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개선문의 전망대가 많이 꼽힌다.

6. 기타
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뒤 파리에 온 아돌프 히틀러는 이 앞에서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히틀러는 소싯적에 파리에서 좀 있었던 적이 있는 터라 파리를 돌아다니며 측근들에게 파리 여기저기를 설명해주기 좋아했다고. 하지만 히틀러가 오기 전에 레지스탕스들이 엘리베이터의 전력선을 뽑아놔서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히틀러가 프랑스는 점령했어도 에펠 탑은 점령하지 못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여하튼 상기한 대로 본국인 프랑스의 '예술가'들은 무척이나 경멸했지만, 적국의 수장조차 인정할만큼 국가의 상징이 된 점은 그야말로 아이러니.

2) 일본에서는 에펠 탑을 모방해서 도쿄 타워를 만들었다. 도쿄 타워의 높이는 에펠 탑 건축 높이 300m에 33m를 더해 333m. 안테나를 올린 에펠 탑의 전체 높이가 330m니까 도쿄 타워가 3m 높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과 외형 치장을 줄여서 철골 사용량은 더 적다.

3) 라스베이거스에도 1999년에 세워진 절반 크기(165m)의 레플리카가 있다. 패리스 호텔의 부속 건물.

4) 2015년 9월 18일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에펠 탑에서 한국 노래로 공연을 했다.

5) 프랑스와 오랜 라이벌 관계인 영국에서는 에펠 탑의 성공에 열폭해서 1894년에 블랙풀 타워라는 탑을 만들었다. 하지만 158m로 에펠 탑 절반을 조금 높은 높이로 300m인 에펠 탑보다 훨씬 낮은데다가 못생겼으며 철골 구조로 인해 대놓고 짝퉁이라는 점이 보이는 정도라서 국제적으로 비웃음만 샀고, 오늘날까지도 블랙풀 타워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에펠 탑 - 나무위키>


에펠 탑에 대한 내용을 조금 정리해보니 이 정도지만,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된 '파리 흉뮬 조각의 역설' 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을 보려고 한국 사람은 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이 에펠 탑을 보려고 프랑스, 파리를 찾는다. 우리 누나만 해도 그랬다. 누나는, 에펠 탑의 야경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해서 신행을 유럽으로 정했고 난 파리와 피렌체를 여행지로 강추해주면서 꼼꼼히 상담해주었다.


랜드마크에 대한 나의 생각

에펠 탑을 적으며 생각해 보니, 난 랜드마크(landmark) 예찬론자인 듯하다. 그 장소의 랜드마크라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넘어서는 좋은 효과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랜드마크란 이런 것들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그곳을 식별하는데 떠오르는 사물이나 지형 둘째, 사진과 영상 등 미디어로 멋지게 남길 수 있는 것 셋째, 생각만으로도 그곳에 가고 싶게 하는 것. 결국 난, 이 세 번째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세계여행을 해오면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랜드마크들은 반드시 다 가보려고 했다. 대륙별로 여행 기록을 되새겨 적어가고 있으니 점차 그 기억들을 다 펼칠 예정. 유럽에서는 영국의 타워브리지, 네덜란드의 잔세스칸스 및 킨더다이크의 풍차마을,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문과 노이슈반슈타인 성, 체코의 프라하 성, 오스트리아의 쇤부른 궁전, 이탈리아의 콜로세움과 베네치아의 배 트라게토(Traghetto), 그리고 여기 프랑스에선 에펠 탑이 있으며, 이 외에도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있었다.


혹자는 "랜드마크만을 보고 찍고 오는 여행은 안 좋다"라고도 하는데, 물론 여행에서 머무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땐 이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는 그 나라와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를 빼놓곤 올 수가 없을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으며, 그 랜드마크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올리고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랜드마크는 '여행을 떠올리는 시발점이자, 결국 내가 그곳에 가서 온몸으로 느끼고 사진과 영상 등으로 직접 담아오는 결과물' 로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 있어 서울을 대표하는 기존에 있던 N서울타워(남산 서울타워) 및 63빌딩 등을 넘어, 최근 8년 사이 2014년에 개관한 세빛섬(Floating Island),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및 2017년에 개장한 롯데월드타워까지 생겨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한국을 방문하는 수많은 해외 관광객들은 이 랜드마크 등지에서 사진을 찍고 인스타와 페북, 유튜브 등에 올려 본인의 추억으로 남기는 것은 물론, 전 세계로 홍보를 해주기도 하므로.


22일 개봉하는 영화 <탑건>의 후속작인 <탑건: 매버릭> 홍보를 위해 방한한 배우들이 롯데타워를 방문.


참 웃긴 게, 그저 그곳에서 찍은 사진인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보면서 그때를 떠올리며 웃게 된다. 시간이 더 지나도 그럴 듯...
에펠 탑 입구 및 탑에 오르기 위해 서 있던 관광객들(ft. 내 카메라를 좋아했던, 위 우산모자 판매상과 일행)
에펠 탑 주변, 마르스 광장

너무 더워서 땡볕인 마르스 광장에 앉진 못하겠기에

센강이 보이는
이에나 다리를 거쳐
Trocadéro Gardens 라는 곳

분수가 보였던 반대편 근처 공원으로 갔다. 여긴 전에는 샤요 궁(샤이오 궁; Palais de Chaillot) 으로 불렸던 곳인데, 이젠 트로카데로 궁(Palais du Trocadéro) 으로 불린다고 한다. 아마도, 소유주가 바뀌었겠지.

그저 에펠 탑이 잘 보이는 곳으로 와서 찍은 사진. 지금보다 호기심과 활기찼던 내 모습

날씨는 해가 쨍쨍해 더웠지만, 그만큼 하늘은 맑아 사진 찍기는 좋았다. 근처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해 좀 찍다가, 이번엔 근처의 개선문으로 향했다. 도보로 20여 분 정도...

그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Av. des Champs-Élysées) 에
그 유명한 프랑스의 루이비통 본점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샤를 드 골 이름을 딴 광장에, 에투알 개선문(L'Arc de Triomphe de l'Étoile) 까지.
에투알 개선문 [ Arc de Triomphe ]
제작시기: 1836년
건축가: 장 프랑수아 테레즈 샬그랭
양식: 신고전주의
재료: 마름돌

에투알 개선문은 높이 51미터, 너비 45미터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서 영감을 받은 이 개선문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1806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승리한 뒤 프랑스 군대의 모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게 한 것으로, 이후 전 세계에 국가나 승전 기념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마름돌을 사용한 디자인은 볼트식 통로의 단순한 아치로, 꼭대기에는 다락이 있으며, 네 개의 기둥에 새겨진 우의적 부조를 비롯한 다양한 도상을 볼 수 있다.

장-피에르 코르토의 <나폴레옹의 승리, 1810>은 월계관을 쓰고 토가를 입은 황제 나폴레옹이 트럼펫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 도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또 앙투안 에텍스의 부조도 두 점 볼 수 있다. 말을 탄 인물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하는 벌거벗은 병사, 그리고 그를 보호하고 있는 미래의 영혼을 묘사한 <저항>, 로마 신화의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보호를 받는 전사가 농부들에게 둘러싸여 칼을 칼집에 꽂는 장면을 표현한 <평화>가 그것이다. 프랑수아 루드의 <1892년 자원병들의 출정>은 전쟁의 여신 벨로나가 이끄는 알몸의 애국자들이 프랑스의 적들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볼트에는 프랑스 공화정 시대와 나폴레옹 치하에서 벌어졌던 128건의 전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다락은 서른 개의 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각의 방패에는 전투의 승리가, 그리고 안쪽 벽에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용사들과 558명의 프랑스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에투알 개선문은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한 무명용사가 이곳에 안장된 후 국가 통합과 화해의 상징이 되어 왔다. 오늘날 무명용사 기념비 앞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기념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투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크 어빙, 피터 ST. 존, 박누리, 정상희, 김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샤를 드 골 광장 한편에서 퍼포먼스를 하던 공연자

세계 최고의 부들,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 거리의 한편엔 이렇게 거리 공연도 하고 있었다. 이게 프랑스니까 어색하지 않아 보였던 거 같다. 경찰이 와서 쫓아낼 수도 있을 만도 했지만, 이렇게 거리공연을 하도록 두는 것 또한 프랑스의 톨레랑스 사상에서 용인할 수 있는 점인 듯싶었다. 이 공연자가 프랑스인이든, 꿈을 좇아 타국에서 왔든 간에 프랑스는 다 받아주는 듯한 인상을 그 당시 나 또한 잠시나마 이 공연을 보며 받았다. 열정적으로 퍼포먼스 춤을 추던 이 공연자가 공연을 마쳤을 때, 관광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개선문 주변까지 둘러본 후, 근처 공원에서 좀 쉬면서 해가 지고 야경이 뜰 때를 기다렸다.

오른쪽 사진에서 왼편엔 관광객, 오른 편엔 누가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파리의 이중성. 위생과 치안이 참 아쉬웠다
일일이 각 건물에 관심을 갖진 않았지만 다 의미가 있을 건축물이라 생각
어느새, 노을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촬영을 하러 Trocadéro Gardens로 가던 길에 본 판매상과 경찰들과의 겉핥기 단속. 그래도 여기엔 경찰들이 나와 단속을 했는데, 판매상들이 생계로 하는 걸 알기에 진짜 단속한다기보단 웃으면서 판매상들을 쫓았다. 그 광경을 보며 내가 느낀 건, 단속은 하 돼 이따금 이렇게도 관광객들에게도 웃음을 주는 건가 싶었다.

아까완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오후 8시 반에 찍은 에펠 탑

그리고 9시가 지나 에펠 탑에 불이 켜져서, 이리저리 달려가서 찍다가 남기게 된

그때 바라본, 센강를 아래에 둔 에펠 탑의 야경

이 땐,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훗날 술 한잔하면서 저 자리에 있으면 그게 더 없는 행복이겠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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