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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현 May 24. 2024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

출근을 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다. 자리에서 짐을 정리하고 업무를 준비하는데, 나의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통화를 한다. 굳어진 표정만큼 나의 마음도 굳어진다.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긴장이 나를 감싼다. 통화가 끝난 뒤 “무슨 일이 있나요?” 애써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힘겹게 물어본다.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은 뒤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른 직장인들도 나와 같을까? 왠지 나만 그런 것 같아서 나의 자존감이 주눅 들지만 이내 ‘그래, 다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며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어디 혼나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나는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알바를 가도 능글맞다는 말은 들었어도 눈치 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런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을까?


그냥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지 않나 생각하며 별 눈치 보는 일 없이 잘 살아왔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눈치도 많이 보고, 과거에 비해 겁내고 조심스러워진 부분이 많이 생겼는데, 이렇게 변한 계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직장생활이 부정적인 면만 준 것은 아니다. 더 넓고 다양한 경험을 접할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법.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동안 내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발생한 수많은 비교와 평가, 그리고 나조차 몰랐던 나의 단점들이 마음의 평온을 깨뜨리고 나를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자존감은 바닷가 모래성 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마음속에는 스스로 높은 장벽을 만들어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였다. 어떻게 하면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과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본모습을 찾고 싶은 바람은 점점 커져갔고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나 교우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날이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통해 마음의 여유를 다시 찾았다. 음악을 들으며 가사와 리듬에 집중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창가를 통해 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비워내거나, 영화를 보며 배우의 감정에 동요되어 다 보고 나면 어느새 기분이 전환되어 중간에 그만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나의 경험은 좋아하는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부르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정의 소용돌이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편안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시절은 이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난 뒤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 더 많은 일들이 나를 괴롭혔고 그 괴로운 감정을 해결하기에 음악과 영화는 여유가 없었다. 이전의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해졌다. 단순한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일까?’ 내가 찾은 결론은 나에게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발생하는 문제는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숙한 부분이 있거나, 주변 동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 발생하였는데 문제가 발생하고 난 뒤 나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정의되는 나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는 일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은 소소하게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나 스스로를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해답이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웠다. IOS (I’m always on my side).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우리가 우울하거나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우 흔히 듣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특히 완벽함을 추구할 경우 자신에 대한 만족의 기준은 누구보다 엄격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나는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어떤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경우 비난의 강도는 한없이 높아진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비난하는 일에 서슴없을까? 왜 이러한 높은 잣대로 스스로를 비난할까?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도한 경쟁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타인과의 경쟁에 익숙해져 버렸고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타인의 흠결을 찾아 내 나보다 낮은 평가나 순위를 받게 만들어야 한다.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흠결을 찾아내 끌어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경쟁에서 상대보다 앞서가기 위해 상대의 흠결을 찾는 것은 전략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어쩌면 나의 발전을 위한 시간보다 효율적이고 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욱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나에 대한 기준은 한없이 높아지고 타인에 대한 기준은 관대하다. 결국 나를 사랑하기보다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혹독하게 채찍질하고 있다. 이런 혹독한 채찍질은 결국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외롭게 만드는데, 아무도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쉽게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결국 불행해지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경쟁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애석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경쟁을 위해 자기 단련을 한다고 한들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인정이 없다면 경쟁이란 제도 내에선 다시 나를 날카로운 칼날로 재단하게 될 것이다. 즉, 자기 단련은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진 뒤 이루어져야 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경쟁을 이기기 위한 혹독한 기준은 나에게 돌아와 나를 재단하고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우선 나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걷어내고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수많은 실수와 오판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훈을 얻기도 하고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나를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다. 그냥 받아들이고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나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당장 나를 사랑한다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작은 실수를 하거나 누군가 나를 비난할지라도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안아주길 바란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나의 편에 서야 한다. 저지른 실수나 잘못의 경중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도덕과 사회규범을 벗어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그 실수가 반복되더라도 그 존재 또한 나 자신임을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나는 언제나 나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나를 판단도, 평가도, 비평도 하지 않는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곁에 있어야 한다.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신뢰와 애정이 바탕이 되는 말이고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신뢰와 애정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전에 경쟁에 내몰린다. 그 강도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며 결국 경쟁에 내몰린 자신을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보다 더 강력한 기준으로 재단한다. 경쟁의 기준에 맞춰 인생을 살아가는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경쟁에서 방해가 된다면 단점이 되어 없애기 위해 노력을 하고,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역시 경쟁에 도움이 된다면 악착같이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재단은 나라는 존재를 지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다. 만약 성격이나 자신의 장점이 경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단점으로 간주되어 최대한 없애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고, ‘나’를 지우는 과정이 시작된다. 아마 이 과정은 그렇게 즐거운 시간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간 내내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겪을 것이며, 실패의 순간이 잦아지면 나에 대한 실망,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괴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성된 경쟁에 최적화된 나는 누구일까? 우리는 경쟁을 시작하기 전 스스로를 사랑할 시간도 없고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경쟁의 최전선에서 나를 지우고 살아가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가족이나 친구가 나의 외로움과 고립감, 비참한 마음을 대신 해소해 줄 수 없다. 결국 그 마음을 이겨내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편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해야 한다.


회사를 다녀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난다. 그중에서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는데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단점이 없다. 업무에서 조금 모자란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모든 것이 용서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보니 이런 사람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그렇게 뛰어나게 잘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작은 행동이나 사건도 주변에서는 세상이 멸망하는 수준으로 부풀려 말하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나를 잘 모르는 다른 상사나, 직원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평판이 안 좋아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가만히 살펴보니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확성기의 역할을 하는 게 눈에 보였고 나 역시 이렇게 있다가 안 되겠다 생각해서 사회생활을 잘하는 다른 동료를 관찰하고 비슷하게 행동해보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참함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사회생활이 과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가름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바, 혹은 당겨줄 수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차이가 눈에 보여서 더 큰 거부감을 가졌다. 이런 거부감을 이겨내고 그들처럼 할 것인가 아니면 다 포기하고 나다움을 찾을 것인가 기로에 서서 고민했고 그 고민의 시간 동안 작은 잘못이 일어나도 ‘나는 저들처럼 안돼’,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옥죄었다. 나라는 본래의 모습을 가두고 채찍질하는 나를 보게 된 것이다. 구석에서 벌벌 떨며 재단당하는 내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아, 이렇게 살다가 내가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이후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자고 다짐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를 인정하는 것도 어려웠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채찍질당하는 나와 그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 이후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회생활 조금 못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행동이 튀는 행동이라고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 모든 건 나 자신이다. 재단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한번 사는 인생인데 태어난 대로 사는 것이 나쁜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 너무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사랑하며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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