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승렬 Apr 14. 2021

이별을 준비하는시간

남겨진 자의 고백

지난해 가을은 유독 아름다웠다. 맑은 공기와 이른 추위 덕이었는지 단풍과 은행잎 모두 군 시절 추웠던 그곳에서 봤던 진하다 못해 깨질 듯 한 색감을 강렬히 뿜어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일상이 늘 감동이었던 이 가을을 마주하며 이내 나는 불안해졌다. 내년에도 너와 이 곳에 서서 작년만 못한 가을이네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침대 너머 보이는 무수한 나뭇가지들, 그리고 바람 불면 흩날리며 사정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이 나무에 파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걸 너와 다시 볼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한 달이란 걸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온몸으로 모든 신경과 생각으로, 너의 시간이 너희 호흡이 다해가고 있음을 매일 매 순간 마주하고 있었다.


너의 목소리를 내일이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단 불안이 사실이란 걸 알게 된 건 그 날 아침에서였다. 주말을 넘기기 어렵겠다. 드라마, 영화 대사 같던 이 한 문장에 말 그대로 다리가 풀렸다. 어떡하지. 한 마디를 속으로 수 만 번 되뇌었다. 정말 어떡하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야 하지. 너에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오늘 오전이라면, 오늘 오후라면, 오늘 밤이라면 도대체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 어떤 과정일지. 나는, 우리는 어떡하지.


그럼에도 우리 둘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너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고 불편함에 뒤척이지 않게 베개의 위치를 머리와 허리 사이에서 계속 옮겨주었다. 느닷없이 신서유기가 보고 싶단 말에 영상을 찾아 틀어주었고,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다 해서 최대한 빨리 달려가 사와 혹시라도 목에 걸릴까 조심스레 빨대를 입에 물려줄 뿐이었다. 우리 둘 다 오늘 이 하루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이별의 말을 내뱉는다면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내 손으로 끊어버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너와 함께 한 모든 날들은 다 행복이었어 같은 대사를 차마 읊을 수도 없었다.


이별을 준비하는 그 시간. 조금 더 미리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시간이 얼만큼인지 알았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한다 더 말해줬을까. 한 번이라도 더 안아줬을까.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하나라도 더 하게 했을까. 어쩌면 다행인 건 이런 부분에 미련이나 아쉬움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린 서로에 대해 굉장히 많은 부분을 알고 이해하고 사랑했으며 매 순간 서로에게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 마지막 날에도 특별히 더 이야기할 게 없었을지 모르겠다. 부모님께, 형제들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못했던, 그리고 당부하고 싶은 말들을 남겼던 그 마지막 순간에도 아내는 나에게 그저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만을 했을 뿐이다. 아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이미 내가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내가 혼자 남겨져보니 이런 대화는 필요했다. 곰붕아 너 네이버 비밀번호가 뭐야, 통장 비밀번호는 뭐야, 인스타그램 비밀번호는 뭐야, 아이들 보험은 뭐가 있었지, 통장은 어느 은행에서 만들었어, 비밀번호는 뭐고. 그놈의 비밀번호. 아내는 내가 쓰는 모든 비밀번호를 다 알고 있었는데, 나는 아내가 쓰는 비밀번호를 단 하나도 몰랐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는 정말 그저 널 다 믿었던 것뿐이다. 굳이 내가 그거 알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물론 그럼에도 너도 날 믿었음에도 넌 내 걸 궁금해했고 난 다 알려줬다) 나와 같은, 그러니까 너의 비밀번호도 나처럼 우리에게 의미 있는 숫자와 기호의 조합일 거라 당연히 생각했는데 단 하나도 그렇지 않았다. 정말 단 하나도. 이 문을 열어 보려면 앞으로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기약 없는 불안함 속에 살아가는 삶은 끝났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까지 일지 비록 알지는 못했지만 그 끝은 이미 왔고, 그걸 겪고 나니 내 삶도 우리 모두의 삶에도 마지막은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하며 매일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기에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있고, 반대로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진 것들도 있다. 주변의 여건은 달라진 게 없지만 삶을 대하는 내 마음 하나의 변화로 많은 것이 변했다.


4월 14일, 오늘은 우리의 9번째 결혼기념일이다. 10주년이 되면, 그러니까 만 10년이 되면 신혼여행으로 갔던 몰디브에 다시 가기로 했고 올해는 그걸 위한 여행비를 별도로 모으자고도 했었다. 살면서 몰디브에 다시 갈 수나 있을까 싶다. 추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제주도 하나 가기도 이렇게 겁이 나는데.


아이들에게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도 있고 우리 곁에도 있어서 항상 우리의 모든 걸 지켜보고 있어,라고. 그러고 보니 자꾸 옆에서 얘기하는 것 같다. 혼자 궁상떨지 말고 빨리 자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