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이틀 전 금요일, 여느 때처럼 하원 하는 온유를 데리러 집 근처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버스 문이 열리고 계단을 내려오는 온유 손에 쥐어져 있던 건 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이 달린 작은 액자. '엄마 아빠 사랑해요 온유 올림'이라고 손글씨가 쓰여있다. 순간 찡해지는 마음을 꾹 참고 유독 더 밝게 인사하며 온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온유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순간 집이 너무 조용하다. 평소 같으면 손 씻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을 온유여야 하는데. 어디에 있나 찾아보니 자기 방 책상에 엎드려 슬픔과 화가 섞인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온유야 무슨 일이야?'
물어도 아무 답이 없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온유가 왜 화가 났는지 이야기해 달라 부탁하니 그제야 하는 말이 '아빠가 유하가 만든 카네이션만 쳐다보고 내 건 손도 안 댔어.'라고 한다. 내가 그랬나? 아니다. 나는 더 평소 내가 내는 소리의 톤보다 한 옥타브나 올려 감탄하며 너무 잘했다 칭찬했다. 그렇담 저건 핑계다. 정황상 진짜 이유가 있다. 온유 몸을 양 팔로 감싸 안으며 얼굴을 대고 조용히 다시 묻는다.
'온유야, 카네이션 만들면서 엄마 생각났어?'
조용히 안기더니 흐느껴 운다. 아마도 하루 종일 어버이날 관련된 이런저런 행사와 만들기를 하며 힘들었겠지. 친구들은 저마다 엄마 얘길 하며 신나 했을텐데. 주변에 말도 못 한 채 평소와 달리 조용히 있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괜찮아. 아빠가 미안해.' 하며 토닥였더니 소리를 내며 엉엉 운다. 이런 일은 한 달에 한 번쯤, 온유와 나 사이에 계속 있는 일이다.
아이들은 감정 표현에 서툴다. 슬픈 이유를 알고 있지만 울어서 풀거나 어떤 방식으로 이걸 표출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게 다른 방법으로 터진다. 짜증을 내거나, 동생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거나, 아빠나 할머니 탓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디 구석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다리 사이에 머리를 뭍기도 한다. 그 마음을 잘 읽어 감정을 스스로 풀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아빠가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는 건 때로 또 거부감을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그저 눈물을 흘릴 수 있게만 살짝 이끌어주는 게 지금의 내 몫이다. 어렵다.
눈물로 접은 온유의 카네이션은 참 예뻤다. 글씨도 잘 썼더라. 아내가 봤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렸다. 뭐, 다 보고 있다 했으니 보긴 했겠지. 보고 예쁘다 했겠지. 그걸 온유도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엄마만 우릴 다 지켜보고 우린 보지 못 하니 불공평하다 말하는 온유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던 어버이날 점심 무렵, 미국에 사시는 외할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문자를 엄마에게 받았다. 나의 외가는 80년을 전후로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전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다섯 남매 중 셋째였던 엄마는 그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셨다. 물론 남편인 아빠, 그리고 누나와 내가 있었지만 80년 무렵이면 엄마 나이가 그래 봤자 서른도 안 됐을 때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얼마나 특별한가. 어딘가에 살아계시더라도 눈으로 보고 손을 대어 안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건 참 아픈 일이었을 것 같다.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다.
그 심정이 어떨지 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였는지, 문자를 받고 순간 여러 가지 모습이 마음 안에서 겹쳤다. 엄마의 '엄마를 볼 수 없는' 지난 40년, 그리고 결국 목소리 조차 들을 수 없는 곳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엄마의 마음. 그 마음을 그동안 헤아리지 못한 나와, 또 다른 엄마의 상실을 겪고 있는 우리 아이들. 그들을 바라보는 나. 생각이 또 마구 엉켰다.
엄마가 살면서 외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보낸 세월보다 어쩌면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 남은 생이 더 짧을 터다. 엄마는 긴 시간을 그렇게 보내셨는데, 이제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영원한 만남을 가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세월의 흐름이란, 인생이란 참 묘한 것이다. 이별 뒤 다시 찾아 올 영원한 기쁨의 만남을 기다리는데, 그러려면 또 누군가는 아픈 이별을 겪어야 한다. 내 세대에도 같은 일들이 다시 반복되겠지.
외할머니를 기억해보았다. 살면서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를 본 날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날짜로 쳐도 한 달 남짓이라도 될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92년, 한 달 정도 미국에 가 있던 그 때다. 필라델피아에 사셨던 할머니와 시내를 같이 여행했고, 어둡고 좁았던 할머니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나에겐 미국에서 있었던 다른 여행보다 다소 지루하고 또 잠자리도 불편했던 그런 순간이었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돌이켜 보게 된다. 엄마는 그 어떤 시간보다 더 좋았겠지.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여행을 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
한 달은 더 버티실 수 있을 것 같았던 외할머니셨는데 너무 갑자기 떠나셨다. 엄마는 백신을 맞고 미국으로 들어 갈 채비를 하고 계셨는데 결국 마지막 눈 맞춤을 못 하고 보내게 됐다. 나는, 솔직히 그랬다. 마음 한편이 아리면서도 따뜻했는데, 내가 아주 가끔이나마 얘기했던 외할머니를 아내는 이제 만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묘하다. 두 사람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내가 참 따뜻하게, 우리 엄마 몫까지 내 몫까지 안아 드렸겠지.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그 해부터 대학에 가기 전 어느 무렵까지 매 년 생일카드를 손수 적어 보내주셨다. 카드엔 꼭 십 불이라도 넣어서 보내주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특유의 카랑카랑 한 이북 사투리도 아직 떠오른다. 차가운 듯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 안에 있었던 건 모두 사랑이었다. 또 늘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셨다. 그 기도의 힘으로 내가 지금껏 잘 살아가고 있음 또한 알고 있다.
2021년의 어버이날. 많은 생각을 한다.
두 아이의 어버이로서, 어버이의 자녀로서 내가 할 일을 찾는다.
남은 삶을 또 더 잘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