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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하고 사사로운 Oct 17. 2018

고양이 아빠의 고백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없었다. 태어나자 마자 엄마를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엄마가 버렸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는 구조물에 갖혀 거의 뼈만 앙상한 채로 발견이 됐고, 구조가 되자 마자 인공항문 수술을 크게 두 번이나 받았다고 했다. 아이는 한 대학의 유기동물센터로 입양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밤에 빛나는 초록색 눈이 무서웠고, 골목길에 창 틀에서 갑자기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나면 소스라쳤다. 고양이를 가까이서 나마 보게 된 건 그 때 좋아하던 아이가 고양이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늘 소시지 같은 걸 들고 다니면서 길거리의 고양이에게 나눠주었다. 소시지가 없는 날에는 직접 편의점에서 사서 나눠주곤 했다. 그 무렵 자취하던 집 대문 앞에는 버려진 아기 고양이가 늘 혼자 웅크려 있었다. 나도 소시지를 사서 고양이에게 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거나, 키울 만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영부영. 당시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고백하자면 어영부영 기르게 되었다. 아는 교수님이 갑자기 러시안 블루 고양이를 입양하는 사람을 찾는 다기에, 아주 잠깐 관심을 가지게 되 것이 유기동물센터 블로그까지 이어졌고 그 아이를 소개 받았다. 사연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지, 고양이에 대한 강한 열망이 그 순간 샘솟았는지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생후 몇 개월 되지 않았던 고양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지하철로 오는 동안, 고양이는 이동장에서 숨죽여 거의 아무 울음도 내지 않았다. 방에 데리고 와 이동장 문을 열었을 때도 고양이는 나오지 않고 웅크려만 있었다. 그러다 고양이는 이동장에서 뛰쳐 나와 침대 밑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몇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그 하루 내내 그랬는지 고양이는 나오지 않았다. 사료와 물을 침대 밑에 두었고 이틀 정도 지난 후에야 나와서 방을 조심스레 돌아다녔다.


  고양이는 침대 위에 올라와 알 수 없는 무서운 소리를 냈다. 바닥을 긁으면서, 긁는 목소리를 내는 걸 보고 너무 무서워서 스마트폰으로 찾았던 기억이 났다. 고양이가 기분 좋으면 내는 일상적인 습관이라고 했다. 고양이에게 그런 습관이 있는 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처음으로 기분 좋은 티를 냈던 고양이의 이름은 빨빨이었다. 나는 고양이에게 팡팡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팡팡이에게는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너를 기른다는 것이 이렇게 많은 책임이 필요한 일인 줄 알았다면 나는 결코 너를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래만 깔아 놓으면 알아서 용변을 볼 줄 알고, 밥도 조절해 먹을 줄 알아서 강아지에 비하면 너무 수월하다고 하지만 생명체를 거두어 기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무서운 일이었다. 살면서 내가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는 무서웠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단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기르는 것일 뿐인데. 그저 사료를 붓고, 물을 갈아주고, 모래를 가는 것이 다인데.


  팡팡이가 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편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사료를 토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픈 것인지, 사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보고 행동을 보고, 추측하고 생각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수 밖에. 팡팡이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은 생각과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것들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내가 고양이를 기른다는 걸 아는 가족과 지인은 가끔 내 안부보다 고양이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고양이는 잘 지내? 많이 컸어?” 혹은 “나와 있으면 고양이 보러 얼른 들어가고 싶지 않아?” 팡팡이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너의 생각을 하곤 했다. 밖에 나와 있으면 고양이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가끔 고양이를 보면서도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더 많았다.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고양이와 강아지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 것을 보고 나는 늘 뜻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하는 것은 그저 사료를 붓고, 물을 갈아주고, 모래를 가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아주 조금 넘칠 때는 가까운 홈플러스에 가서 연어 맛 과 닭고기 맛이 나는 고양이 캔을 하나씩 샀다. 하나에 1,600원 짜리였다. 나는 3,200원으로 죄책감을 아주 조금 덜어버리고자 했다. 머리 속으로 그 정도면 합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 아래 칸에 있는 홈플러스용 고양이 사료를 안아들고 집으로 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끔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먹을거리를 사오곤 했던 아빠를 생각했다.


  전 직장에서 6년 간 나는 회사의 교육 담당자였다. 짧으면 2박 3일, 길 때는 일주일이 넘게도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저 사료를 조금 더 붓고, 물을 조금 더 많이 갈아주고, 모래를 가득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집을 비우는 날이 조금 길었을 때는 문 앞에서부터 팡팡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피곤에 지쳐서 바로 침대에 드러눕기라도 하면, 자기의 온 몸을 나에게 부비고는 했다. 잠깐 동안도 많은 양의 털이 곧 옷에 엉켜 붙고는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나는 털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 지에 머리가 더 아파졌다.


  가끔 모르고 방에 올려 둔 옷이나 이불에 오줌과 똥을 싸 놓기라도 했을 때는, 현관문을 그냥 열어 놓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옷을 버렸다. 화장실에 모래가 있는 데도 이불에 오줌을 쌀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적도 많았다. 팡팡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가 이런 아이인 줄 알았다면, 나는 너를 기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양이는 계속 길러야 돼? 언제까지 기를 꺼야?”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쩔 때는 “그럼 어떻게 해요?”라고 되물은 적도 있었다. 고양이를 기르면 결혼하기 어려울 거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도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그럼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대답한 건 도의적으로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번 버림받은 아이를 다시 버리는 건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팡팡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를 정말 좋아하고 아껴서, 너가 너무 나에게 소중한 존재여서 라기 보다는 나의 윤리적이고 도의적인 자존심 때문에. 한 가지 더 이유가 있었다면 그건 그 몹쓸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몰래 고양이를 기르다가 이사 때문에 고양이를 잠깐 후배에게 맡겼던 적이 있었다. 팡팡이는 어느 구석에 숨어서 이틀이 넘게 움직이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고양이를 길러 본 후배도 어쩔 수가 없어 도로 고양이를 데리고 왔었다. 나에게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고, 너무 겁이 많고 눈치를 보는 팡팡이가 고마우면서도 조금 미웠다. 어쩌면 기르는 고양이마저 내 성격을 닮은 건지.


  요 몇 달간, 몇 년 만에 다시 불면증에 시달렸다. 텅 빈 마음으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기 남은 건 결국 고양이와 나 밖에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팡팡이를 봤는데, 6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팡팡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팡팡이를 지켜 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와서 몸을 부비다가 콧등을 내 입술에 부딪히고 다시 자기 일을 하러 돌아갔다. 그날 밤 잠이 너무 안 와서 이불을 들쳤더니 팡팡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잠깐 팡팡이를 안았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팡팡이를 멍하게 지켜봤다. 팡팡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외로운 처지가 되고 보니 팡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가 있으면 덜 외롭지 않아?”라고 어제 누군가 질문을 했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6년 간 늘 있는 듯 없는 듯이 있는 존재라서, 나는 앞으로도 몇 년간은 그저 사료를 붓고, 물을 갈고, 모래를 채워 놓을 거 같아서. 그러다 팡팡이 조차 없는 방을 상상하니 너무 서글퍼져서, 팡팡이에게 너무 미안해질 거 같았다. 아마도 다음 날 나는 집 앞 홈플러스에 들러서 고양이 캔을 두 개 살 것이다. 그래도 죄책감이 조금 더 높아지면 미뤄둔 캣 타워를 주문하고, 약간의 죄책감을 더 덜 것 같다. 잘 해야지 생각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도 결국 후회의 대상으로 남겨뒀던 누군가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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